나의 올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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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 하우스의 좁다란 침대 위에 맥없이 누워버립니다. 지난 며칠간 제주도를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을 막 공항으로 보내고 돌아온 참입니다. 이제 혼자가 되었습니다. 나홀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여행 중간에 막상 혼자가 되고 보니 허탈감이랄지, 외로움이랄지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제주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만큼을 다시 보내고 나면 서울에서 (지겹도록) 만날 친구들인데 왜이리 서운한 걸까요? 남겨진 자의 비애, 혹은 숙명 같은 것이겠지요. 떠나는 자는 떠나면 그 뿐이지만 남겨진 자는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법입니다. 같이 갔던 식당이나 담소를 나눴던 카페, 함께 걸었던 길.. 떠난 자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자리에서 말이지요.

 


‘이래서는 안 돼. 이제부터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거라고!’
애써 생각을 고쳐 먹고 이불을 발로 힘껏 걷어차며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의지의 표현으로 주먹도 살짝 쥐어봅니다. 오늘부터는 올레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제주 올레를 처음 접한 건 2010년 여름의 일입니다. 이전에 이미 대여섯 번 제주도를 방문한 적이 있던 터라 [제주도]에 대한 설렘 한 편에는 식상함이 자리하고 있을 때였지요. 한데 올레를 걸으며 만난 제주도는 이전에 내가 알던 제주도와는 달랐습니다. 관광 버스나 승용차로 내달리다가 유명한 관광 명소가 나타나면 표를 끊고 들어가 휘리릭 구경하고 다시 차에 올라 이동하는 패턴의 여행에서는 보고 느낄 수 없었던 제주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지요.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도는 전혀 다른 곳으로 제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하고도 반을 더 돈 2012년 겨울의 끝자락에서 올레, 그 길 위에 다시금 서게 된 것입니다. 올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2007년 9월 올레 1코스의 개장을 시작으로 현재는 19코스까지 개장되었습니다. 언젠가 새롭게 열리는 길이 올레 1코스와 만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올레를 걷는 것만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일주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그 날은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의 선택은 16코스입니다. 개장된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제법 따끈한 길이지요. 제주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16코스로 가는 버스를 찾아보았습니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답니다. 제주에서는 버스가 서울만큼 자주 오지 않습니다. 오전에 숙소에서 외로움에 몸부림 치느라 늑장을 부린 탓에 해가 지기 전까지 16코스를 완주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그 때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알려주시길 ‘곧 출발할 버스가 무수천에 가는데 무수천에서 십여 분만 걸으면 16코스 종점이 나오니 거기서부터 역방향으로 16코스를 걸을 수 있다’는 말씀.  

지체 없이 버스에 올랐지요. 무수천에서 내려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말씀해주신 방향으로 걸어가니 정말 올레 안내 표식인 파란색/주황색 화살표와 나뭇가지에 걸린 리본이 보입니다. 와락, 오랜만에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입니다. 외로움 타령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제주의 풍경을 만끽하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래, 이거야. 내가 원한 여행이라는 건.



 


그런데 이상합니다. 16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으려면 주황색 화살표를 따라 걸어야 하는데 진행되는 방향은 정방향을 뜻하는 파란색 화살표입니다. 이십여 분을 걷다가 우연히 올레꾼을 만나 물어보니 제가 걷고 있는 길은 17코스랍니다. 16코스를 가려면 반대 방향으로 걸었어야 하는 거죠.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길을 잘못 가르쳐 준 겝니다.

그 때부터 제가 서 있는 길은 쓸데 없는 시간 낭비의 길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목표는 17코스가 아닌 16코스이기 때문이지요. 부리나케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갑니다. 더 이상 풍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무사히 16코스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얼마 후 ‘16코스 종점’이라는 안내판을 발견하고 나서야 안도감과 더불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역방향으로 16코스 걷기를 끝내고 다음날은 6코스를 걸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하거든요. 여행지에서 날씨는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순응하는 수밖에요. 전날 걷기로 인한 피로감에 비바람까지 더해져 속도는 쉬이 나지 않지만 정방 폭포와 천지연 폭포, 이중섭 미술관 등이 건네는 감동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자동차가 아닌 내 두 다리로 직접 걸어가 만난 곳들이잖아요. 6코스를 끝내고는 택시를 타고 서귀포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잠자리에 누워 이번 여행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즐겁기만 했던 친구들과의 여행과 홀로 걸었던 약 35km의 길.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 만약 내 목표가 17코스였다면 길을 잘못 가르쳐 준 버스 기사 아저씨를 원망하며 그 길을 걷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 6코스 종점 이후에도 올레 표식이 있었다면 그 길을 택시를 타고 쌩,하니 지나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제주의 참 풍경을 보겠다고 선택한 16, 6코스의 올레길 이외의 다른 모든 길은 저에겐 의미 없는 길이었던 셈이지요. 17코스의 길도 그리고 올레 화살표가 없는 길도 제주의 풍경을 이루는 길임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목표를 이루어 가는 삶이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라 생각하지요. 가고 싶은 올레 코스를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완주했을 때 제대로 올레를 걸었다고 뿌듯해 하는 것처럼. 그러나 올레라 이름 붙지 않은 다른 길에도 제주의 풍경은 녹아 있습니다. 싱싱하게 살아 있습니다. 비바람 부는 제주와 말간 해가 뜬 제주를 오롯이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여유를 가져야 할지 모릅니다. 목표를 살짝 빗나간 삶도 즐길 줄 알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삶의 참다운 풍경이 더 많이 더 깊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로서 제주도 방문의 횟수가 한 번 더 추가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제주를 식상하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안 가 다시 제주도를 찾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지구를 너무 크게 만드신 탓에 아직도 가봐야 할 미지의 땅이 많지만 가본 곳도 이렇게 또 가고 싶어지니 아무래도 저는 오래오래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