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
겨울 햇살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따뜻하게 쏟아지던 오후, 서울 논현동 ILD 사무실에서 시각장애 아동의 미술교육을 후원하는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샌드위치’ 김진희 대표를 만났다. 잘 정리된 갤러리 여기저기에는 질박하지만 섬세한 조소 작품과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저쪽에 있는 인형도 아이들이 만든 거예요. 특히 학교를 만든 작품은 무척 잘 만들어서 다들 놀랐지요.”
김진희 대표는 인사를 건네자마자 애정과 자랑이 담긴 따뜻한 목소리로 시각장애 아이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최소한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아이들 역시 또래 친구들처럼 스마트폰으로 셀카도 찍고 싶고, 박물관도 가고 싶어 해요. 조금만 도와주면 저렇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시각장애 아이들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가둬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 아동에 대한 교육은 다른 장애우를 위한 제도들이 그렇듯 너무나 열악한 수준이다. 아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동화책도, 창의적인 교육도 전무했다.
최소한의 지식 전달에 급급한 시각장애 아동들의 교육 실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몇몇 뜻있는 예술가들이 모여 15년 전 시각장애아를 위한 미술교육이라는 힘든 첫걸음을 뗐다. 국가의 지원은커녕 학교의 지지도 어려운 상황에서 십 수년간 사비를 들여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과 미술 자재를 사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매주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실로 전쟁 같은 일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고 보람도 있었지만 사회와 학교의 외면 속에서 개인의 소명의식만으로 지속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일이었어요. 수업 진행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 마련조차 어려워 지속 여부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저와 몇몇 디자이너들이 모여 후원 모임 ‘샌드위치’를 시작했죠.”
샌드위치 회원들은 매월 한 번씩 각자의 사무실에 모여 샌드위치와 함께 후원을 위한 아이디어 회의를 연다. 샌드위치라는 이름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모임을 운영하며 더 많은 후원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노력과 장애우와 비장애우 사이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 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 미술교육이 왜 필요한가라는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도 아이들은 미술교육을 통해 눈에 띄게 성장해나갔다. 오감을 통해 소통하는 아이들에게 크레파스와 찰흙은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지만 보이는 시각에 사로잡히지 않은 독창적이고 섬세한 아이들의 작품은 수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에게도 큰 감동과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시작은 어려웠으나 수업 소식을 들은 전국 맹학교의 요청으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며 프로그램을 늘리게 되었고, 특별 워크숍도 진행하고 있다. 교육 분야도 넓혀 작품 전시와 점자촉각책 제작, 미술관 투어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3년 전에는 서울 한빛맹학교에 처음으로 사진반을 개설했다.
“기본적으로 ‘본다’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처음 사진을 찍어본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사진으로 보여지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무척 신기해하고 즐거워했어요. 아이들에겐 카메라가 제2의 눈이 된 셈이었죠.”
아이들은 사진 수업을 대단히 좋아했다. 뷰파인더에 눈이 아닌 귀를 가까이 대고 바람 소리를 따라 하늘을 찍고, 발자국 소리를 따라 길을 찍으며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아이들은 온몸의 감각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수업마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찍으면 선생님이 사진을 읽어주고, 그 설명을 들으며 아이들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찍고 싶었는지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사진 수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아이들의 작품 속에는 기성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몇 년간의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작품이 상당수 모였고 그 가운데 훌륭한 작품도 많아 고민 끝에 <마음의 눈>이라는 작품집도 내게 되었다. ‘우리 어려우니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아이들의 작품성을 당당히 인정받고 사회와 소통하게 하고 싶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과 참여를 통해 제대로 된 사진집을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작품이 정말 좋았습니다. 카메라에 귀를 대고 렌즈의 초점이 맞는 소리를 듣고 손을 뻗어 거리를 가늠하며 찍은 아이들의 작품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구도와 화사한 색감들로 가득합니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전문 사진작가 분들도 감탄할 정도였지요.”
<마음의 눈> 사진집에는 아이들의 작품 외에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주제로 조선희, 강영호 등 전문 사진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실려 있다. 이번 사진집의 이익금은 전액 아동들의 미술교육 후원에 쓰일 예정이다.
“보이지 않아도 꿈은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안 수술을 통해 세상을 보게 해주는 것도 좋지만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더 많은 아이들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격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광균 시인의 ‘외인촌’ 마지막 구절입니다. 청각적인 ‘종소리’를 시각적인 ‘분수의 흩어짐’으로 표현한 공감각적 시적 표현의 진수로 많은 분께서 기억하고 계시는 시구(詩句)이리라 생각합니다.
어린 예술가들은 작품 한 컷 한 컷마다 소리와 오감을 담아냅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의 숨소리도 담겨 있습니다. 제자를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마저 인화지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평면적인 사진 한 장에 이처럼가득한 세상을 담을 수 있었을까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라는 의구심은 작품집을 펼치는 순간 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의지해 찍는 사람들과 달리 햇빛의 따사로움, 바람이 만드는 소리,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 선생님의 목소리, 심지어 철의 냄새를 통해 스스로 구도를 만들고, 셔터를 누른 아이들의 작품에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볼 수 있다고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 어린 예술가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저는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다는 걸 평생 몰랐을 것입니다. 낙엽이 구르는 작은 소리에도 이처럼 깊은 풍경이 숨어 있다는 걸 몰랐을 것입니다.
멋진 사진을 찍은 아이들은 본인이 찍은 사진을 못 본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 적이 없어서 ‘본다’라는 개념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본인이 찍은 사진을 통해 ‘지나간 시간’에 대해 비시각장애인과 소통한다는 사실에 무척 신나 한다고 하니 아이들의 작품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집을 펴낸 ‘샌드위치’는 사회 각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시각장애 아동들의 미술교육을 후원하는 단체입니다. 4년여간 맹학교 사진반 아동들의 작품 활동을 후원하며 이들이 가진 다양한 꿈과 가능성을 열어주고자 작품집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처음엔 단순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나 작품집을 보며 오히려 제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잔잔한 감동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음의 눈> 작품집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았습니다. 시각장애 아동들이 세상과 시각적 소통을 해나가는 뜻 깊은 발걸음에 힘찬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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