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안무가 차진엽, 몸이 짓는 아름다움을 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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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겐 TV 프로그램 <댄싱9>의 카리스마 심사위원으로 유명한 차진엽.  하지만 그녀는 십수 년 전부터 이미 유수의 상을 휩쓴 무용수이자 굵직한 작품을 연출한 안무가입니다. 그녀를 만나 신뢰로 일궈낸 삶을 들었습니다.

 

 

 타인을 향한 신뢰, 새 무대가 열린다

 

관객은 객석을, 무용가는 무대를 할당받는다. 어느 날 그 오래된 약속이 지루하게 다가왔다. 해갈을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안무가 차진엽이 종합예술을 지향하며 창단한 ‘Collective A’의 첫 공연 <로튼애플(Rotten Apple)>이 그 변화의 시작이었다. 


“무대를 좀 더 자유롭게 선택하면 어떨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관객이 이동하면서 보는 전시 형태의 공연을 기획했던 거예요. 8개의 공간에서 무용수들이 다양한 행위를 하고 관객은 미로 같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원하는 것을 보는 공연이었죠.”


종이 벽이 만든 좁은 길을 걸으며 각 방에 있는 무용수와 마주하는 ‘사건’은 놀라웠다. 어떤 순서로 어느 방향에서 ‘사건’과 맞닥뜨릴지 선택한 관객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은 채 무대에 흡수됐다. ‘행위’의 주체와 ‘시선’의 주체를 한 공간에 서열 없이 존재케 한 것은 관객을 신뢰하기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관객 또한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원한다’는 인간 자유의지에 대한 차진엽의 신뢰가 낳은 변화였다. 


“메시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뭘 보여주고 어떤 얘길 하고 무얼 느끼게 하고 싶은가보다 중요한 건 관객이고 관객의 선택이죠. 누구나 원하는 걸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은 또 자신의 서사와 맞물려 또 다른 무엇을 창작한다고 믿어요.”


신뢰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과연 될까?’ 싶던 공연은 대중과 무용계 모두를 매혹시켰다. “기존의 공연 형식의 개념을 벗어나 공연의 새로운 형식을 확장시켰다”라는 평과 함께 2012 한국 춤 비평가상 베스트 작품상, 2012 춤 평론가상 춤 연기상을 수상한 <로튼애플>로 차진엽은 ‘안무가’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관객과 Collective A를 믿는 사이 그녀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로 거듭났다. 

 



 

 협업이 만드는 아름다움

 

관객과 호흡하는 무대를 지지해준 건 함께 공연을 준비한 파트너들이었다. 협업 없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분야이기에 관계를 잘 맺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중요했다. 차진엽은 춤을 잘 추는 무용수 개개인보다 서로 신뢰하는 팀의 무대에 더 끌렸다. 테크닉으로 멋진 장면을 만들 수 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오라에 비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개체가 만나 빚어내는 의외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른 예술가들과 작업하며 이미 경험했다. 2009년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 조안무를 맡고, LG아트센터 공연 <조율>에서 전통 춤과 교감하며, 이윤택, 원일 등 유수의 연출가와 작곡가, 미술가, 영화감독과 협업하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연대에 행복했다.

 


 

 불안 없이 스스로를 믿으세요

 

돌아보면 이미 지닌 것을 지키기보다 미지의 것을 궁금해하고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은 차진엽이었다. 발레밖에 몰랐던 소녀가 현대무용으로 전공을 바꿀 때도,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역할을 확장할 때도, 탄탄한 국내 활동을 뒤로하고 낯선 해외 무대로 도약한 모든 순간 그녀는 자신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안이 꿈틀거리면 마음을 다잡으며 변화를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한 자리로 나아갔다.

 

“20대 춤은 어둡고 신체 움직임도 과격해요. 항상 나를 고민하죠. 30대에 와서는 ‘나’보다 더 큰 세상을 보게 되더라고요. <페이크 다이아몬드(Fake Diamond)>라는 작품이 그 맥락에서 나온 풍자극이었어요. 그런데 최근엔 좀 더 큰 우주, 우주 안에서의 한낱 먼지, 죽음으로 가는 인간을 생각해요. 보이는 현실 너머의 다른 공간들을요.” 




 

머물지 않아야 길이 생긴다. 차진엽은 몸을 움직여 길을 만든다. “신체주의와 ‘의미’의 무용을 교묘하게 융합”하는 현재의 자신을 믿는다. 그래서 과거를 당당하게 기억하고 미래를 불안 없이 기다릴 수 있다. 그녀가 낸 길 위에서 남루한 일상을 벗고 산책할 그날을, 누구라도 신뢰할 자유로운 순간을 기대해본다.

 

글 | 우승연
사진 | 한수정(Day40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