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여정 끝에 황홀하기를.. 지극한 다독 생활의 이유

Story/효성


글. 이충걸(에세이스트)
글을 쓴 이충걸은 <GQ KOREA> 초대 편집장으로 18년간 일했다.
저서로는 소설집 <완전히 불완전한>을 비롯해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슬픔의 냄새>,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등이 있다.


나는 늘 책 읽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평생 나의 취미는 탁구 치기, 친구들과 술 마시며 이야기하기, 그리고 책 읽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시력 절반이 소실된 뒤론 탁구를 칠 수 없게 됐다. 이제 남은 취미가 두 가지뿐이라는 게 서글프면서도 어쩐지 기쁘다.


2년 전 <지큐> 편집장 일을 그만두었다. 생업을 접은 뒤 ‘트레바리’라는 독서 클럽에서 고전 소설과 현대 소설 포함, 모임 몇 개를 이끌기 시작했다. 국가 판정 시각장애자가 책 모임에 가담하다니, 거의 매일 생물학적인 아이러니를 느꼈다. 그러나 나에겐 독서의 문화적 부드러움보다 나 스스로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하나같이 어렵고 두꺼워서 모임을 함께한 친구들은 늘 폭풍 같은 한숨을 쉬었다. 토론을 마치면 나는 사악하게 못박았다.


“이 책은 이번 아니면 평생 못 읽었을 거예요. 이제 세상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여덟 마리 새끼 돼지>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구별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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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이야기 속 찬란함


독서 행위에는 영광만 있지 않았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없던 인내심까지 쥐어짜게 만들었다. 산 중턱 요양원에 모인 군상들을 통해 전쟁의 침울함과 출구 없는 희망을 펼치는 소설의 광대함은 고전에 몰두했던 어린 시절의 나로 데려갔다. 그러나 1,465페이지라는 두께는 그렇다 치고 번역은 타는 불에 기름이었다. 나는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나의 무지 대신 어쩌면 한국말에 약한 번역자를 탓했다. 결국 <마의 산>을 읽는 여정은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거나, 허리의 추간판이 탈출하거나, 시력이 완전히 멀거나 셋 중 하나인 전투가 되었다.


독서 모임 날, 친구들 얼굴에는 K2를 오르는 고역스러움과 깃발을 꽂은 긍지가 동시에 아롱졌다. 시간의 틈새를 파고들어 완독한 이의 기쁨에는 누구도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조르주 베르나소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나에게 아직까지 가장 처절한 책이다. 프랑스 작은 교구로 부임한 신부는 시종 무력한 어둠에 포박돼 있었다. 나까지 신의 은혜를 잃고 버려진 것 같았다. 겨울비가 내리는 밤 성당의 찬 바닥에 엎드린 채 자멸하듯 간구하는 장면에선 그 고독과 물리적인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 그대로 눈물이 흘렀다. 토론 자리에서 나는 물었다.


“신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고통받는 것이 인간의 조건일까요? 영성을 얻기 위한 길에는 왜 그렇게 깊은 우울이 기다리는 걸까요? 결국 몸이 붕괴될 때도 고통은 의미 있을까요?”


우리 집 서가에는 지난 2년 동안 읽은 책이 병정처럼 열을 지어 꽂혀 있다. 가끔 벼 이삭을 훑듯 손등이 책등을 스칠 때 치성하듯 도자기를 닦는 백자 수집가의 내밀한 기쁨을 알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 책이 벼슬을 주지도 않고 부자로 만들어줄 리도 없는데. 나의 구차한 대답은 이것이다. 책 읽기의 비밀은 아무리 읽어도 금방 잊는다는 것이지만 그 기억은 마음속 뉴런과 시냅스 사이를 떠돌다 인생의 가장 남루한 순간에 문득 작은 빛을 비추어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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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끝, 빛이 될 책



<마의 산> 토마스 만

폐병으로 요양 중인 사촌을 문병 간 주인공. 이 호화로운 요양원 환자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세상을 ‘저 아래’라고 부르며 그들만의 관습대로 살아가고 있다. 사촌을 방문하며 요양원에서의 삶을 체험해보고자 하던 주인공은 자신 또한 폐병 진단을 받고 요양원에 계속 머무르며 다양한 인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조르주 베르나소스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본당에 부임해온 한 젊은 신부는 가난과 욕망, 육체적·정신적 나태에 어그러진 마을을 목격하고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악’과 싸우는 용기와 힘, 의지를 얻기 위해 일기를 써 내려간다. 나약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고결한 인간 본성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