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인문학] 기억보다 추억보다 강렬한 ‘회억’

인사이트/라이프


‘과거에 연연하지 마세요’라는 말, 자주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챙기며 미래로 나아가라는 거죠. 영어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Let bygones be bygones’.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놓아두라는 것이죠.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우리말 관용구와 같은 의미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pasado es pasado’라고도 얘기한다고 해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뜻이죠.


이런 표현들은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미래는 미래’라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분리하여 바라보는 시각이죠. 사실 맞는 말입니다. 문법의 시제 또한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으로 구분되어 있잖아요. 과거형을 쓰다가 갑자기 현재형이나 미래형을 쓰면 문장이 어색해지죠. 확실히 과거, 현재, 미래는 각기 다른 시간대(different time zone)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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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다?!


그런데 인문학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시간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게 ‘회억’이라는 개념입니다. 독일의 미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자주 사용한 용어입니다. 토닥토닥 인문학 ‘아우라’ 편에도 발터 벤야민이 등장한 바 있죠.


회억과 비슷한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기억’과 ‘추억’인데요. 기억이란 과거의 일 또는 사람을 단순히 돌이켜 생각하는 것, 추억은 과거의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죠. 둘 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무언가(누군가)’를 머릿속에 잠시 불러오는 일입니다. 기억과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그 빈 자리는 현재의 삶으로 채워집니다.


과거가 잠깐 동안만 소환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일부가 되고, 이로써 미래에도 영향을 주게 될 때, 이런 경우를 기억도 추억도 아닌 회억이라 부릅니다. 우선 회억에 대한 설명을 볼까요?


회억은 (···) 과거의 순간들로부터 새로운 현재를 불러내어 그것을 떠올리는 '지금 시간'과 공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과거는 (···) '지금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_ 미학자 김남시 논문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 발터 벤야민의 회억 개념」(2015) 중


이 설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예가 떠오릅니다. 영화 <러브레터>인데요. 주인공 여성은 죽은 연인을 너무나 그리워 한 나머지,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답장이 오죠. 주인공의 연인과 이름이 같은 한 여성으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주인공은 그녀를 만나게 되고, 자신도 미처 몰랐던 연인의 아름다운 내면을 발견하게 되죠. <러브레터>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영화 <러브레터> | 출처: daum 영화


주인공이 생각지도 않게 받은 답장이 ‘회억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세상을 떠난 연인과의 “과거의 순간들로부터 새로운 현재를 불러”낸 것이 바로 그 편지였으니까요. 이때부터 과거의 연인은 “’지금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됩니다. 연인을 그저 기억하거나 추억하기만 했다면, 주인공에게 연인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겠죠. 하지만 편지를 계기로, 과거의 연인은 현재라는 시공간 안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이미 세상에 없는 연인을 생전의 시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시간대로 이어져 아름다운 ‘사랑의 회억’을 빚어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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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회억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회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개념도 아니에요. 왜냐고요? 우리가 늘 회억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동창 모임도 회억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한때 ‘효성초등학교 6학년 2반’ 교실에 있던 친구들이, 이제는 각기 다른 모습이 되어 다시 한자리에 모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인사하죠. “넌 그때랑 똑같다”, “너 왜 이렇게 멋있어졌어?”, “몰라보겠다 너~” 같은 말들 말입니다. 어른이 된 동창생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모두의 시선 안에는 과거와 현재가 겹쳐져 있습니다.


울보에 코흘리개였던 녀석이 멀쑥한 정장 차림으로 눈앞에 나타날 때, 그리고 갑작스레 그 녀석에게서 설렘(!)을 느낄 때, 이것은 그야말로 “과거의 순간들로부터 새로운 현재를 불러”낸 사건이 됩니다. 울보 꼬마, 코흘리개 소년을 떠올리며 더 이상 킥킥댈 수만은 없겠죠. 근사한 어른으로 성장한 현재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연애의 감정이 느껴질 테니까요.


시즌3까지 방영되며 큰 인기를 끈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 또한 회억의 프로그램이죠. 지금은 잊힌 옛 가수들을 그저 기억하고 추억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무대 위로 불러내 “'지금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하니까요. 2020년의 대중이 1990년대 가수 양준일 씨를 회억한 결과로, 그는 ‘90년대 지드래곤’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얻게 된 것입니다.


90년대에서 2020년으로 소환된, 아니 회억된 스타 양준일 씨 | 출처: JTBC Entertainment 유튜브


과거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바꿔줄지도 모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방치해둔(?) 과거, 여러분에게도 아마 있을 것 같습니다. 보물 찾기 하듯, 그 과거들을 현재로 ‘회억’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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