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 눈의 황홀
‘I se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I understand’와 같은 의미로, ‘그렇군요’ 또는 ‘이해했어요’를 뜻합니다. ‘봄(see)으로써 알게 된다(understand)’는 인간의 의식 체계를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우리말에서도 ‘보다’라는 행위는 단지 시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가령, 누군가에게 ‘사람 잘못 보셨어요’라고 말한다면 어의는 대개 둘 중 하나입니다.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셨나 보군요’ 또는 ‘저에 대해 오해하고 계시군요’. 앞이 온전한 시각 차원의 문제라면, 뒤는 시각(잘못 보다)을 지각(오해하다)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언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시각―지각의 밀접성은, 과학적으로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무언가/누군가를 보는 시기능(Visual Function)에 의한 시각 정보가 대뇌후두엽을 거쳐 중추신경계로 전달되면서 시지각(Visual Perception)이 일어난다.’ 이렇게 사물·현상·인물에 대한 시지각 처리가 완료되고 나면, 이후부터는 그 사물·현상·인물이 특정 시지각에 입각한 이미지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지각이라는 것은 개인의 체험이나 지적 수준, 또는 개인이 소속된 집단 및 국가의 문화에 따라 제각각이죠. 소 한 마리를 보고 누구는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구는 창을 들고 싸움을 벌입니다. 까마귀를 보고 이쪽에서는 길조라 반기고, 저쪽에서는 흉조라 난색하며 포획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똑같은 대상을 보는데, 저마다 다르게 보여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게) 보인다’라는 것은, 이렇듯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닙니다.
영화 <아바타> 주제곡 ‘I See You’ 뮤직비디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외계 부족 나비(Na’vi)의 인사말이 바로 ‘I See You’입니다.
‘당신을 봅니다’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폭넓은 함의를 지닌 말로 영화 속에서 표현됩니다.
출처: Youtube
이렇게 보고 그렇게 보이는 것들의 요지경
그래픽디자이너 마쓰다 유키마사의 저서 <눈의 황홀>은 ‘보이는 것의 매혹, 그 탄생과 변주’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아서 이렇게 보이는 것들, 그렇게 보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사례 분석으로 인류 문화사를 꿰뚫어 보고자 하는(see through) 책입니다. 다 읽고 나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책입니다.
출처: 알라딘
1장. 쌍이라는 관념 깨끗함과 더러움 | 그리스도교의 좌우관 | 조로아스터교의 빛과 어둠 | 자유와 구속 | ··· 2장. 속도에 대한 동경 빨리 달리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 | 기술·동력·교통혁명 | 철도와 환경 파괴 | ··· 3장 원근법과 깊이감의 발견 ‘여기와 저기’의 발견 | 세로로 긴 서양의 종교 건축 | 가로로 긴 일본의 종교 건축 | ··· 4장 직선의 발견과 사각형의 탄생 사각형의 성립 | 질서와 프레임의 탄생 5장 마방진과 격자무늬 3마방진과 격자무늬 | 바둑과 격자무늬 | 지도와 격자무늬 | 메르카토르와 격자무늬 6장 나선과 만취감 식인과 나선 | 나선과 만취감 | 떨림과 나선 | 나치스 영화 속 나치스 마크 7장 추상 표현의 시작 철도와 추상 | 조감과 추상 | 검은 사각형 | 켈트의 추상 8장 반전하는 이미지 ‘人’이라는 한자의 반전 |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 배경에 동화되는 스트라이프 | ··· 9장 선과 연속이라는 개념 선과 연속 | 포드주의 | 라인 살인 사건 | 건축과 축선 10장 ‘섞는다’는 행위 혼합 혐오 | 한자와 영어 | 신문과 포스터 | 붙이다 | 파피에콜레와 콜라주 | 몽타주 | ··· 11장 감각의 치환 원근법적 감각의 서열 | 문자의 역할 | 문자와 문신 | 청각의 시각화, 악보 | ··· 12장 가독성에 대한 추구 음독과 두루마리 | 발음에 따른 표기 | 묵독과 책자본 | ‘가독성’을 가속화하다 | ··· 13장 변화와 리듬을 주다 리듬과 강약 | 구두점과 강약 | 알파벳과 강약 | 일본어의 구두점 | 네 박자와 세 박자 | ··· 14장 풍요로운 단순함 창조설과 진화설 | 일본의 단순함 | 읽기 쉬움에서 어수선함으로 | 서체 미학의 발생 | ··· 15장 가둔다는 것 목숨을 가둔 토기 | 시간을 가둔 달력 | 신의 힘을 가둔 한자 | 문자를 가둔 종이와 인쇄 | ··· 16장 레디메이드 그리스도교의 레디메이드 | 뒤샹과 레디메이드 | 레디메이드 신화 | 케플러와 레디메이드 | ··· 17장 데포르메 데포르메와 상징 | 반원근법으로서의 데포르메 | 원에서 타원으로 | 수치의 시각화 | ··· 18장 오브제 분위기를 교란하는 오브제 | 몽상과 오브제 | 숫자와 오브제 | 몽상과 주술 | ··· |
차례 구성이 꽤 방대한 듯 보여도, 대체로 약술 형식이고, 전문용어를 가급적 배제한 듯한 쉬운 문장과 적절한 유머, 흥미로운 도판 덕분에 한 장 한 장 소화에 큰 무리는 없는 편입니다. 총 368쪽 분량인데, 각 장마다 다루어진 소재의 가짓수와 범위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슬림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368kg짜리 역기 리프트라기보다는, 5kg 무게 아령을 여러 번 들어 올린다는 감각으로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총 열여덟 개 장이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으므로, 굳이 1장부터 순서대로 읽으며 진도를 나갈 필요는 없겠습니다. 또한, 저자가 어느 한 장에 다른 장과 연관된 내용을 기술한 부분에는 ‘○○장 참고’라고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장의 순서보다는 저자의 지표를 따라가는 읽기 방식이 좀 더 이 책을 효과적으로 섭취하는 요령이 아닐까 합니다.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다는 건, (~하게) 보이는 경우의 수 또한 많다는 것.
말 그대로 ‘more than meets the eye’(보이는 것 이상).
스트라이프, 극혐 무늬에서 혁명의 심볼로
맛보기로 8장 ‘반전하는 이미지’ 한 장만 소개해보겠습니다. 8장은 이 책의 부제이자 주제이기도 한 ‘보이는 것의 매혹, 그 탄생과 변주’를 챕터 하나로 압축해놓은 것 같습니다. <눈의 황홀> 요약본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은데요.(책 표지를 큼직히 장식한 피리 부는 사내의 이미지도 8장에 나오는 도판입니다.)
스트라이프 무늬는 의상과 인테리어 등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디자인 패턴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흔한 일상성을 갖기까지 굴곡진 역사를 거쳐야 했다는군요. 우선, 스트라이프 무늬는 중세 이슬람권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일종의 시각 기호였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죠.
사막에는 많은 부족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금방 소속을 알 수 없으면 곤란해진다. (···) 사막이라는 대해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눈에 잘 띄는 색과 무늬가 필요했다. 그래서 색의 강약만으로 구성된 스트라이프 무늬가 나타났던 것이다.
_ 본문 138쪽
중세 이슬람권 민족의 생활(생존) 화두는 ‘눈에 잘 띄어야 한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세 유럽 쪽은 어떤가 들여다보니,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눈에 잘 띄었다가는 이교도 취급까지 당합니다.
(···) 유럽 중세에서는 오감 가운데 청각이 중시되었다는 것이다. 시각은 신을 보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다른 것을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눈에 띈다는, 이를테면 시각을 우위에 둔 상태는 허용할 수 없고, 그런 자는 저급한 시민이라고 했던 것이다.
_ 본문 139쪽
이런 와중에, 눈에 띄려는 이슬람 문화와 눈에 안 띄려는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가 한바탕 싸움을 치렀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군전쟁이었고, 다들 아는 바대로 십자군은 대패했습니다. 패배의 트라우마 탓인지 유럽인들은 스트라이프 무늬를 극도로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극혐’ 의식은 심지어 제도화되기에 이릅니다. 로마 교황이 스트라이프 무늬 착용 금지령을 내린 것이죠. 못 입게도 했지만, 특정 부류에게 입(히)도록 강요도 했습니다. 주로 하층민과 이교도 들이 강제로 스트라이프 무늬 옷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사형 집행인, 광대 등 당시 천민 계층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대부분 세로로 된 스트라이프 무늬 옷을 입고 있습니다.(<눈의 황홀> 표지를 장식한 피리 부는 사내의 옷 또한 세로형 스트라이프 무늬입니다. 가로줄과 세로줄 사이의 문화적 낙차에 대해서도 이 책은 기술하고 있는데, 지금 이 글에서는 언급을 생략하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가르친 그리스도를 섬긴 이들이, 이토록 극렬히 타인을 혐오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합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그린 <도박꾼들>(1594).
가운데와 오른쪽 남성이 스트라이프 무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출처: Wikipedia
16~17세기 종교 개혁을 주도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발흥으로, 스트라이프 무늬 또한 큰 변화를 맞습니다. 로마 교황과 가톨릭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프로테스탄트가 스트라이프 무늬를 특애했기 때문이죠. 천민들의 상징이었던 스트라이프 무늬는 이제 유럽 상류층의 ‘핫’한 패션으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큰 계기를 통해, 가히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 할 만큼 격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1749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박물학자 뷔퐁의 《박물지》 다. 이 책에서 뷔퐁은 스트라이프 무늬를 가진 얼룩말의 근사함, 아름다움, 기품을 이야기했다.
또 하나는 1777년 미국이 열세 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스트라이프를 국기에 채택한 일이다. (···) 영국에 대한 종속을 의미하기 위해 (···) 하인들에게 스트라이프 무늬의 옷을 입힌 것과 같은 식으로 빨간색과 하얀색의 가로 스트라이프를 사용했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 가로 스트라이프는 오히려 혁명적인 무늬로 부상하게 되었다.
_ 본문 144쪽
이런 역사적 부침을 관통하며 스트라이프 무늬는 오늘날의 일상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스트라이프 무늬는 강약이 분명한 탓인지 이미지 반전의 기복도 심했다”(본문 146쪽)라고 하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입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
<눈의 황홀> 저자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때는 적백청의 스트라이프가
혁명을 상징하는 무늬로 변모했다”라고 설명합니다.
출처: 다음 영화
아는 만큼 보이는 황홀경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대로 보입니다. 몰라서 ‘그렇게만 보였던’ 것들이, 알고 나니 ‘이렇게 보이는’ 체험은 그야말로 지적인 황홀경, 열락(悅樂)이라 이를 만합니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는 이 특유한 쾌락을 욕망하며, 우리는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의 황홀>을 유쾌하게 읽으셨다면 아래 두 권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눈의 모험> <눈의 황홀> 저자 마쓰다 유키마사의 또 다른 책입니다. 선, 면, 문자, 등에 나타난 닮은꼴 형태를 분석하며 인간의 시각 활동과 시지각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라는 장은 <눈의 황홀>과도 이어질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형태의 탄생> 일본의 저명한 그래픽디자이너이자, 오랜 시간 동양의 도상(圖像)을 연구한 스기우라 고헤이의 저서입니다. <눈의 황홀>이 세계사 전반에 걸친 이미지들의 기원을 개괄했다면, <형태의 탄생>은 동양 도상의 이미지적 기원을 집중 분석한 책입니다. <눈의 황홀> 일독 후 바로 이어서 이 책을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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