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Story/효성



‘불금’이라는 말은 있는데 ‘불월’은 없습니다. ‘월요병’은 흔해도 ‘금요병’에 앓아봤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제 출퇴근 일상의 한 단편입니다. 아래 영상을 보면 월요병/불금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사정은 아닌 듯한데요. 





희화화된 측면이 강합니다만, ‘월요병/불금’은 주 5일제 출퇴근 일상을 살아내는 직장인(피고용인)의 보편적 삶의 패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뜨끔한 사실은, 일주일간 여름휴가를 보낼 때는 병/불 개념이 사라진다는 것이죠. 똑같은 일주일인데 한쪽은 병으로 시작하고, 다른 쪽은 날마다 불태울 수 있다는 현실이 얄궂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다 보면, 나는 출근을 ‘억지로’, 즉 ‘비자발적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래서 이 책,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을 소개해드립니다. 잠들기 전에 잠깐 펼쳐 보시면 머릿속이 정리될지도 몰라요. 


 

출처: 알라딘




 조금씩 천천히, 꼭꼭 씹으며 읽어야 할 책


336쪽 분량의 퍽 두툼한 책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학과 예술, 특히 미학에 대한 내용이며, 서양화가이자 조각가인 저자 홍명섭의 강의록을 엮은 것입니다. 그래서 차례는 ‘장’이 아니라 ‘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강. 착용가능한 철학: 웨어러블 필로소피 

2강. 거꾸로 가는 인과론의 시간 

3강. 비자발적 감수성, 비자발적 사유, 그리고 우발성 

4강. 약도 되고 독도 된다 

5강. 나는 내 바깥이다 

6강.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사물: 그림자 연기론 

7강.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8강. 사용과 효과 

9강. 시선 중심의 ‘벽’과 수평적 ‘바닥’ 인식 

10강. 타자의 발견과 재현의 문제 

11강. 시각과 언어는 존재 형식 

12강. 의도와 표현 

13강. 의미의 발생과 시간 



13주 일정인 인문학 강의 커리큘럼 같기도 합니다. 일주일에 한 강씩 천천히 읽어나가며 13주 일정으로 한 권을 꼭꼭 씹어서 완독하는 방법을 추천해드립니다.(‘한 달에 한 권’이라는 코너명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격무 탓에 독서조차 사치인 분들은 3강 ‘비자발적 감수성, 비자발적 사유, 그리고 우발성’만이라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직장인 독자들, 특히 이 글 서두와 같은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직춘기’ 여러분이 읽어볼 만한 내용이거든요. 


 

오늘도 비자발적 격무에 지친 여러분, 잠깐만 일어나보세요 




 거미줄에 갇힌 거미가 자유로운 까닭


이를테면 ‘자발성이란 뭔가요?'라는 첫 문장으로 3강은 시작합니다. 글쎄요, 정말로 자발성, 자발적인 것이란 뭘까요? 일찍이 철학자 칸트는 “자기 존재의 원인과 근거를 자기 자신 속에 지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는데, 내일 출근할 일이 걱정인 입장으로서는 어렵기만 합니다. 도입부를 좀 더 읽어보도록 하죠. 



창의적 발상이란 바로 자발적인 생각과 그런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알고/요구받고 있지요? 사실 우리는 매사에 도처에서 자발성을 권유받고 있지 않나요? 무엇이든 억지로 해서 되겠는가! (중략) 의지한다, 의존한다는 말은 안 좋아 보이지요? 그러나 그럴까요? (83쪽)



저자는 우리가 그동안 긍정적인 가치로 학습해왔던 자발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능동적 자발성이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의 생각과 성향을 반복해서 대상에 투영하고, 다시 확인하는 몸짓과 같다”라고 설명하는데요. 


 



마치 홀로 벽에다 대고 공을 날리고 되받는 스쿼시처럼, 자기가 휘두르기 때문에 익숙하게 인지되는 자기 라켓의 강도에 반응하는 공을 되받아치는 정도의 ‘제한된’ 자유를 반복해서 누릴 뿐입니다. 이런 입장은 언제나 자기 확인 이상의 영역을 탐험해내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남이 쳐서 날아온 공은 그 속도와 강도와 방향이 항상 예측되는 것은 아니지요? (86쪽)



자발성에 대한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이러한 입장은 질 들뢰즈라는 철학자로부터 연유한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발성이란 아이들의 장난처럼 목적이 없는 행위이므로 개체적인 생명력과 쾌감에만 머무를 뿐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발성이 아닌 ‘자주성’을 강조했죠. 말 그대로 ‘내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 3강에는 이 자주성과 연관지어 음미해볼 만한 명쾌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바로 거미/거미줄입니다. 물론 이 비유 또한 출처는 들뢰즈입니다. 


 



그러나 거미 팔자란 스스로 친 거미줄에 갇힌 형국이지만,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드는 것만 가지고도 자기 먹이가 ‘되게-한다’는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86쪽)


내가 기대고 있는 바깥과의 ‘비자발적’ 만남과 압박 속에서 내 먹잇감이-되게 하는 거미처럼 (선택을 앞서는) 자기원인 창출이 나를 정말 자유롭게 하는지를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93쪽)


오직 ‘우발적’으로 걸려든 먹이만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선택지가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 (자발성이 차단된) 신세. 그러나/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미는 모든 우발성(침입)을 받아들이는 데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요. (97쪽)




 거미-인간, 스파이더맨


이 책에 설명된 거미의 모습은 주 5일체 출퇴근 일상을 살아내는 직장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미의 거미줄은 출근과 퇴근, 월급에 해당할 수 있겠죠. 직장인은 이 거미줄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벗어나면 생활이 불안정해지니까요. 비록 비자발적일지언정, 월요병을 피하지 않은 채 한 주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월요병을 피하지 않는다’로부터 일단 시작해봅시다. 사실, 월요병이란 내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퇴사가 그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일단 월요일에 출근한 이상, 우리는 그 자유의지 대신 비자발성에 몸을 맡긴 것입니다. 책의 표현을 빌리면 스스로 친 거미줄에 갇히기로 한 것이죠. 이제부터는 ‘우발성’의 연속입니다. 거미-인간이 된 우리는 그 우발성들을 ‘내 먹잇감이-되게’ 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거미줄은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것이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왠지 장기근속을 독려하는 글처럼 읽힐지도 몰라 덧붙여봅니다. ‘거미줄’이란 비단 직장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죠. 직장인에게 월요병/불금으로 짜여진 거미줄이 있듯, 다른 누군가에겐 각자 사정에 따른 촘촘한 거미줄이 있기 마련일 테니까요. 


저마다의 거미줄 안에서, 모두가 거미-인간, 스파이더맨이 되어봅시다. 





<한 달에 한 권> 더 보기


[한 달에 한 권] 호모 모빌리쿠스

[한 달에 한 권]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한 달에 한 권]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한 달에 한 권] 단테의 신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