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고래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래는 포유류로 분류됩니다. 아가미가 없으므로 숨을 쉬려면 물 밖으로 숨구멍을 열어야 합니다. 생물학자들은 고래의 뼈 구조에서 앞다리와 뒷다리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고래의 꼬리지느러미가 수평이라는 사실인데요. 일반적으로 어류의 그것은 수직입니다. 따라서 좌우 방향전환이 재빠릅니다. 이와 달리 고래의 수평형 꼬리지느러미는 상승과 하강을 자유롭게 해주죠. 갓 태어난 새끼 고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꼬리지느러미를 위아래로 힘껏 저어 수면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생애 최초의 호흡을 위해서죠.
성장한 고래는 최대 두 시간가량 숨을 참고 수심 3,000미터 아래로 하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상승해 또 한 번의 잠수를 위한 큰 호흡을 합니다. 포유류인 고래가 어쩌다 땅의 생활을 등지고 힘겨운 수중 생활을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왠지, 직장인들과 좀 비슷한 것 같네요. ‘직장인’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우리도 한때는 숨 가쁘지 않아도 됐던 본래의 ‘서식지’를 갖고 있었잖아요.
세상은 전속력을 다해 빨라지는 듯하고, 그만큼 직장인들의 일상도 전력질주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늘 한 번 바라볼 새도 없이, 숨을 참아가며 업무에 매진 중일 이 시대의 ‘고래’들을 위해 책 한 권을 준비했습니다.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라는 제목입니다.
“밥에 붙들려 꽃 지는 것도 몰랐다”
위 문장은 책 띠지에 적힌 문구입니다. 이 책은 51편의 시를 묶고, 각 시편에 대한 감성적 해설을 덧붙인 형태로 구성돼 있습니다. 지은이 김기택 시인은 직장생활과 시 쓰기를 20여 년간 지속했었던 작가입니다. 『사무원』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었죠. 그런 그가 “밥에 붙들려 꽃 지는 것도 몰랐다”라고 고백할 때, 그 말은 직장인 독자들에게 큰 공명을 줄 듯한데요. 김기택 시인이 소개하는 시와 그 해설에는,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자 했던 고운 의도가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사내가 수레를 끌고 언덕바지를 오른다 사내의 비틀린 몸은 땀방울을 쥐어짜고 있다 // 수박이 실린 수레 뒤에서 배가 불룩해진 여자가 끄응끙 수레를 따른다 한쪽 손으로는 무거운 배를 안고, 한쪽 손으로는 수레를 밀면서 // (중략) // 소아마비 뒤틀리는 사내의 몸속 굽이치는 무늬가 길을 휘감고 오른다 만삭이 된 수박 수레바퀴를 돌린다 // 저 고행 끝에 가을이면 꼬투리가 터지리라 단단한 꼬투리 뒤틀어지는 힘으로 씨앗들이 톡 톡 터져 나오리라 // 머리가 짓눌릴 때마다 볼펜을 똑딱거리며 바라보는 사무실 창밖 배배 튼 길이 꼭 볼펜 속 스프링 같다 꾸욱 짓눌리는 힘으로 따악 소리를 내며 튕겨오르는 스프링 // (후략) _ 손택수 시 「스프링」 부분(<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에서 재인용 제 몸보다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려면, 제 몸무게보다 훨씬 큰 삶의 짐을 감당하려면, 「스프링」의 부부처럼 반동의 탄력을 위해 먼저 제 몸을 움츠려야 한다. (중략) 지금 이 순간 내가 몹시 힘들고 위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프링이 한껏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능하거나 보잘것없이 보인다면 그것은 제 안의 꽃이 터질 순간의 환희를 기다리는 스프링이 최대한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_ 앞의 책 본문 중 |
사무실에서 “볼펜을 똑딱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는 어느 회사원.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수레 끄는 남편과 수레 미는 아내. 손택수 시인은 회사원의 시선과 ‘볼펜’이라는 사물을 통해 부부의 힘겨운 수레 끌기/밀기로부터 “짓눌리는 힘으로 따악 소리를 내며 튕겨오르는 스프링”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이에 대해 김기택 시인은 “제 안의 반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려야 한다는 해설을 덧붙여주었네요.
감각의 숨구멍 열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오감(五感)이라 합니다. 미술, 음악, 문학 등을 통해 이 오감을 발달시키는 ‘예술치료’라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은 예술가의 ‘보기’ 행위에 대해 “예민한 감광판(感光板)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내면의 예민한 감광판을 통해 자신만의 느낌(이미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일 것입니다.
날마다 오감을 사용함에도 ‘오감만족’의 행복을 경험하기 힘들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감동하고 감응할 여유가 부족한 탓 아닐까요. 특히나 사무적 일상에선 이런 여유 찾기가 더더욱 힘들 텐데요.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가 우리의 닫혀 있던 감각의 숨구멍들을 다시 열리게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 마리 여치가 한거번에 우는 소리 //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 (중략) //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_ 김혜순 시 「잘 익은 사과」 부분(앞의 책에서 재인용) 「잘 익은 사과」는 오감을 통해서 사과가 걸어오는 말을 들려준다. (중략) 사과에서 풀려나오는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는 시골 가을밤의 시원한 바람 냄새를 불러오고, 자전거 타고 가는 길에 뺨에 닿는 그 기분 좋은 바람의 촉감을 끌고 온다. (중략) 감각의 마술이며 축제다. 이 시는 독자의 손에 진짜 사과를 쥐여주고 사과 속에 든 온갖 맛과 향기와 시원한 가을바람과 드넓은 시골의 풍경이 하는 말을 온몸에 흡수하게 해준다. _ 앞의 책 본문 중 |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깎는 동안 시인은 시골 마을의 정겨운 풍경을 떠올렸네요. 폴 세잔의 표현처럼 ‘예민한 감광판’이 작용했던가봅니다. 이는 김기택 시인의 해설처럼 “오감을 통해서 사과가 걸어오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자, “감각의 마술이며 축제”이기도 합니다. 마들렌 홍차 한 모금에 유년기의 추억을 회상하며 희열을 느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마음에 고래의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다시, 고래의 꼬리지느러미를 생각해봅니다.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어서 수면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그 꼬리지느러미 말입니다.
직장인 여러분, 오늘은 또 얼마나 숨 가쁜 하루를 보내고 계신지요. 상하좌우로 유연하게 움직였던 마음의 꼬리지느러미가, 어느 틈엔가 지금 당장의 좌우만을 살피는 뾰족한 수직의 형태로 변하지는 않았는지요. ‘낙천적’이라고 할 때의 ‘낙천(樂天)’은 ‘하늘을 즐기다’라는 뜻이라고 하죠.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할 수 있는 여유, 그 마음의 꼬리지느러미, 부디 잘 간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을 바라본다 _ 정호승 시 「고래를 위하여」 마지막 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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