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운다] 만우(晩愚) 조홍제 회장의 경영 철학

2014. 4. 11. 09:26

 

만우(晩愚) 조홍제 회장의 경영 철학

 

 

오징어 3만 근으로 면사 100근을 들여오다

 

 

효성의 모태가 된 동양나이론 울산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1969년)

<효성의 모태가 된 동양나이론 울산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1969년)>

 

 

해방 이후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해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호암 이병철 회장과 공동으로 삼성을 창업한 만우 조홍제 회장은 일찌감치 무역업에 도전해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펼쳤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가 신용도가 바닥 수준이었으니 지금은 흔한 D/P거래(외상거래)도 상상하기 어려웠으며, 물건을 사 오려면 현금이나 현물거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만우 조홍제 회장은 해외 바이어들을 설득해 오징어 3만 근을 담보로 면사 100근을 수입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D/P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끈기와 자신감으로 이뤄 낸 것입니다. 

 

 

혜안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모험가

 

 

1962년 효성물산을 토대로 독자 사업에 나선 만우 조홍제 회장(가운데)

<1962년 효성물산을 토대로 독자 사업에 나선 만우 조홍제 회장(가운데)>

 


1960년을 전후로 미국이 원조를 줄여나가고 한국 경제가 극도의 경기 침체를 겪고 있을 때 만우 조홍제 회장은 호암 이병철 회장과의 동업을 청산하기로 협의했습니다. 그리고 약속 받았던 지분을 찾느라 시간과 힘을 허비하기보다는 빨리 독자 사업을 진행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1962년 9월, 임직원 15명으로 조촐하게 효성물산을 설립했습니다. 녹록지 않은 경제 여건 속에 아무런 기반 없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힘든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우 조홍제 회장은 달랐습니다. 제일제당 설립을 진두지휘한 경험을 살려 부실 기업이었던 조선제분을 인수해 업계 2위로 올려 세웠고, 역시 재기불능이라던 한국타이어도 정상화시킴으로써 '미다스의 손'이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의 현실과 발전 가능성 등을 면밀히 분석해 제분업과 타이어 산업이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음을 간파한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공이었습니다. 이처럼 만우 조홍제 회장은 어둠 속에서도 작은 빛줄기 하나를 나침반 삼아 어떠한 험로라도 반드시 헤쳐나간 모험가였습니다. 

 

 

 한국 경제에 뜬 샛별, 동양나이론


 

동양나이론 공장 전경. 지금의 효성을 이루는 단단한 주춧돌이 됐다

<동양나이론 공장 전경. 지금의 효성을 이루는 단단한 주춧돌이 됐다>

 


만우 조홍제 회장 일생의 화룡점정은 동양나이론 설립이었습니다. 만우 조홍제 회장은 효성이 주력할 신규 업종을 찾기 위해 2년간 조사한 끝에 20가지가 넘는 유망 사업을 발굴했고, 수입 대체 효과가 큰 주력 사업으로 나일론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황무지나 다름없던 울산공업단지 내 부지 39만 6,694㎡(약 12만 평)에 공장 설립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중합이란 개념에 대해 잘 이해하는 화학 전문가가 거의 없어, 공장 설립도 해외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우 조홍제 회장은 우리 기술 없이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국내 기술자들을 설계부터 건설, 공장 가동 등 전반에 걸쳐 깊이 관여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6년 드디어 동양나이론이 탄생했으며, 이는 이후 효성이 세계적인 화학섬유기업으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래까지 내다보며 쉬운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가길 마다하지 않은 만우 조홍제 회장의 선택은 오늘날 세계로 뻗어 나가는 자랑스러운 기업, 바로 효성을 일구어 냈습니다.

 

 진행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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