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호주에 심은 한 그루 나무는 지금 어디까지 자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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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이 잠시 외출했던 것이 틀림없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긴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십여 분을 걸어 강에서 길어온 물을 방금 심은 나무 위에 주고 발로 꾹꾹 밟으며 내심 불평을 해 댑니다. 강은 왜이리 멀고, 물은 또 왜 이렇게 무겁단 말입니까? 오전 내내 심은 나무 묘목들이 쭈욱 일렬로 보기 좋게 늘어서 있지만 아직도 더 심어야 할 나무들이 많습니다. 호주에서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파란 하늘과 쨍한 햇살도 얄밉기만 한 하루입니다.
한국에서조차 나무 한 그루 심어본 적이 없는 내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것도 돈을 내가면서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고 있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습니다.

 

 

 

 

 

 

 

 

저는 CVA(Conservation Volunteers Australia) 활동 중입니다. CVA는 호주의 자연 보호 활동을 진행하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여러 각국에서 지원한 자원봉사자들이 6~10명 단위로 한 팀을 이루어 나무 심기, 공원 산책로 보수, 잡초 제거, 동식물 서식지 복구와 같은 자연 보호 활동을 진행하게 되죠. 숙식을 비롯한 부대 비용을 호주 정부가 50% 지원하기 때문에 참가자는 소요 비용의 50%만 지불하면 됩니다.

 

 

 

 

 


 

 

한달 남짓한 호주 배낭 여행을 계획하며 이왕이면 좋은 일도 하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며 뜻 깊은 시간을 보내보자는 마음에 신청한 2주간의 CVA 활동.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습니다. 미국, 캐나나, 영국, 호주인으로 구성된 우리팀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은 나 뿐이었죠. 나라마다 다른 영어 악센트로 인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4종류의 전혀 다른 언어를 동시에 접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첫째 날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버린 나는 그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 못 알아 들을까 봐 겁이 나서 자꾸 혼자이길 원했지요. 그러다 보니 쉬는 시간에조차 일행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나무만 열심히 심었지요. 그야말로 노동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내심 후회가 될 수밖에요. CVA 활동을 포기하고 그냥 배낭 여행이나 할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치켜드는 생각들.

 

셋째 날 밤이었던 가요. 호주인 리더가 한밤중에 포섬(Possum)을 보러 나가자고 제안을 해 왔어요. 포섬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인데 야행성이라 주로 밤에 볼 수 있다면서요. 그때 우리는 국립공원 한 가운데 외딴 건물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밤에 숙소에 혼자 남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행을 따라 나섰지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리더의 손에 들린 랜턴 하나에 의지하며 숲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일행을 놓칠 새라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고 일렬로 나아가는 길. 몇 종류의 동물들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결국 포섬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근처 초원에 나란히 누워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은하수’를 접한 밤이였지요. 그와 함께 귓가를 스치던 바람과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완벽한 자연의 경이로움. 포섬을 보지 못한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과연 단순한 배낭 여행이라면 가능했을까요? 한밤중에 외딴 국립공원 안에서 만나는 은하수와 내 안에 찾아 든 평화를 말이지요.

 

 

 

 


 

 

 

 

다음날부터 저는 달라졌습니다. 제가 달라지니 현실도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전날 밤 서로에게 의지해 숲을 헤쳐 나가며 생성된 동지의식이랄까요, 친밀함이랄까요. 나는 더 이상 팀원들을 무서워하지도 나의 부족한 영어를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지요. 내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아도 그들은 내 말을 잘도 알아들었고,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속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궁금해했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았던 처음 며칠과는 달리 2주는 쏜살같이 지나갔어요. 와인 농장을 방문해 여러 종류의 와인을 홀짝홀짝 시음하고는 모두들 취해서 헬렐레 했던 일, 호주 현지인 집에 초대 받아 바비큐 파티를 열었던 일, 요리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 날마다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되었던 일,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가 밤이 새도록 국립공원 숙소에서 영화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든 일. 그 모든 일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CVA 활동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보다 더 기억에 남는 나만의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최근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발견한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몇 년 전 참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고등학생인 다카코와 그녀의 배 다른 남매 도오루가 매년 열리는 학교 축제인 보행제에 참가하여 밤을 새워 걸으며 서로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게 된다는 내용의 성장 소설이지요.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잔잔한 파문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밤의 피크닉]이라는 제목 앞에 그려지는 풍경 하나. 오래 전 호주에서 포섬을 보겠다고 나섰던 한밤의 보행제. 피크닉.

 


 

 

 

 

 

 

그 때가 언제였나 싶게 저는 바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젊은 친구들의 사정 또한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시험이니 취업이니 승진이니 살아가면서 헤쳐나가야 하는 난관들은 결코 우리 곁을 쉬이 떠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런 사실은 우리 곁엔 함께 그 길을 걷는 누군가가 있다는 겁니다. 다카코가 그리고 도오루가 발이 부르터 오는 고통 속의 보행제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던 건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힘을 내어 꾸준히 제 길을 가다 보면 나를 지치게 하는 오늘이 피크닉으로 기억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육체적 고통을 동반하는 보행제 앞에 ‘피크닉’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작가나,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고 땀을 비오듯 흘리며 보냈던 시간들을 ‘피크닉’이라는 말에 떠올리는 나를 보면 틀린 생각은 아닐 겁니다. 그나저나 제가 호주에서 심었던 어린 묘목들은 지금쯤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있겠지요. 혹시 모를 일입니다. 오늘밤 그 나무 위에서 포섬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지도.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m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