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 회담' 일리야의 나라 러시아 바로 읽기, 요네하라 마리 <러시아 통신>
“제가 새로운 한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러시아에 대한 질문은 ‘러시아는 얼마나 춥냐’라는 것이에요. 진짜 북쪽으로 가면 추워지지만, 러시아는 크기가 크기 때문에 추운 지역도 있고, 겨울이 없는 지역도 있어요.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정보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까지 비정상회담의 러시아 대표로 활약했던 일리야는 한국 사람들이 러시아에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그 이유로 정보 부족을 언급했습니다. 저 역시도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는데요. 냉전시대 때 미국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던 나라라는 것, 그 외에는 그렇게 예쁘다는 러시아 여자들과 독한 보드카, 그리고 이름도 어려운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정도였네요. 아마 세계사나 정치외교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다른 분들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파란 눈의 러시아 여성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요?
(다음 링크를 참고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참고 링크: 바로가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그려봤어요.
그랬던 제가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 활동했던 요네하라 마리의 <러시아 통신>이라는 책을 읽은 후 신비스러운 러시아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데요. 러시아가 그만큼 매력적이어서인지, 아니면 그가 글을 재미있게 써서인지, 이 내용을 혼자 알고 있기가 너무 아까워서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보드카 없는 러시아는 앙꼬 없는 찐빵
지혜로 러시아를 알 수는 없지
흔한 잣대로 러시아를 가늠할 수는 없다오
러시아는 독자적인 얼굴을 갖고 있거든
러시아는 그저 오로지 믿을 수 있을 뿐
(표도르 튜체프의 시)
- 작가의 말 ‘수수께끼 속 수수께끼를 푸는 마음으로’ (p283)
러시아인조차 이렇게 스스로 말할 만큼 러시아는 동양적인 특성으로도, 서양적인 특성으로도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런 러시아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무려 두 챕터(정확히 107페이지)에 걸쳐 러시아인의 보드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추녀는 없다. 다만 보드카가 부족할 뿐” (p17)
“미국인은 자기조절을 못하는 인간을 경멸하고 정치가로서 실격이라고 판단하지만 러시아인은 국민 앞에서 경계심을 풀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수롭지 않게 술에 취해버리는 정치가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p48)
“두 쌍 중에 한 쌍이 헤어질 만큼 이혼율이 높은 러시아에서 이혼 사유의 50퍼센트 정도가 남편의 음주 문제라고 한다.” (p61)
이 외에도 보드카로 유리를 닦거나 몸을 닦기도 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까지… 놀랄 만한 회식문화를 갖고 있는 한국에 살면서도 읽으면서 입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왜 러시아인들은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는 걸까요. 요네하라 마리는 그 이유를 일정 부분 씁쓸한 사회의 현실에서 찾습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러시아의 경구에서 ‘추녀’를 ‘추한 현실’로 바꿔보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많은 직장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도 술집을 찾는 걸 생각해보면 씁쓸한 웃음이 나옵니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나요? 소련의 당 서기장(최고 권력자)으로 취임한 이후, 개혁 개방을 추진해, 피를 흘리지 않고 냉전 시대의 종말을 가져와 199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막상 러시아인들에게는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러시아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술에 대해 규제를 실시했고 (술을 완전 금지하는 금지령이 아니라 단순한 절주령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혁 개방 정책)가 처음의 기대와 다르게 러시아인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빈부의 격차는 확대되고, 범죄율은 높아져가고, 대중들의 취향을 반영하지 못한 언론사는 문을 닫았습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은 서양의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유행하는 최신 패션의 옷을 입고 다니는 반면에,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식료품 진열대가 텅텅 비어 굶어 죽고, 나라 밖에서 식료품이나 의료품을 지원받아야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작가는 러시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아아, 역시 러시아인은 아직은 괜찮다. 돈, 돈,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배금주의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을 순수하게 믿고 받드는 시장 만능주의의 세례를 통과한 러시아인은, 더 냉정하고, 더 강하고, 그리고 더욱 늠름해졌다.” (p161)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한 판 승부
요네하라 마리는 그냥 평범한 통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연설을 도맡아 통역하고,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다음 권력자로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인물입니다.) 옐친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그녀가 일본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자신의 견해인 양 공식 석상에서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거물급 인사들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녀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기에, 책에 나오는 일화들은 마치 연예계 뉴스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 (보드카 부분을 제외하면) 바로 고르바초프와 옐친 사이의 권력 투쟁 이야기입니다. 고르바초프는 엘리트 출신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출세 가도를 달려왔으며,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한 권력자의 특성인지 국민을 믿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다시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내쳐졌던 옐친은 국민의 인기를 기반으로 부활했었기에, 국민의 평가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통신>에서 묘사된 옐친의 모습은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기보다, 질투심 많고 뒤끝이 긴 어리광이 많은 아저씨의 느낌이었는데요. 고르바초프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고르바초프가 평소에 좋아하던 밀크티를 가져다주는 직원에게 이딴 음료는 마시지 않겠다고 성질을 내고, 일본 외교관이 고르바초프를 칭찬했다는 이유로 일본 방문 일정을 취소해버리고 (공식적으로는 다른 이유이지만), 연설이 장황하던 고르바초프와 반대로 솔직하고 간결한 담화를 밀고 나갔다는 일화들이 그렇습니다.
현재 러시아의 지도자는 고르바초프도, 옐친도 아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죠. 옐친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1999년 이래로, 연임 제한에 걸려서 총리직을 수행했던 시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계속 최고 권력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8년 재임에 성공하면 무려 20년 이상의 장기 집권을 하게 된다니 대단한 사람이죠. 게다가 국민 지지율이 80%가 넘는다고 하니까요. 사실 이 책에는 옐친 대통령의 이야기까지만 실려있어요. 암으로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요네하라 마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제 이번 여름 휴가는 러시아로 떠나려고요. 그녀가 이야기해준 러시아인의 매력과 러시아의 사회 모습, 러시아의 향기를 마음껏 느끼고 와야죠. 이 책을 읽고나서 혹시라도 지금의 러시아가 어떤모습인지 궁금하신 분은, 여름이 끝난 후 제게 물어봐주세요. 러시아가 얼마나 매력적인 곳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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