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트 클럽'으로 본 사라져버린 나의 감수성
나는 소유할 수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싶었다.
나는 세상을 밑바닥에 빠뜨리고 싶었다.
- 소설 '파이트 클럽' 서문
<소설 '파이트클럽'의 표지>
여러분은 성악설을 믿으시나요, 아니면 성선설을 믿으시나요? 가끔은 공상 중에, 저를 담금질 하는 사람의 이마 한 가운데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손길’을 다이렉트로 꽂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런 저를 지금까지 사회에서 인간 대접 받으며 살고 있게 한 것은 바로 도덕성! 도덕성! 도덕성이라는 윤리로 인해 파충류 단계의 욕구와 충동성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포스터>
'파이트 클럽'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타일러는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의 현실 속 껍데기를 벗어 던진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분신입니다. 영화의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소설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시사점을 영화 속 이곳 저곳에 던져 놓았습니다. 불면증으로 인해 정신상태가 해이해진 주인공, 그의 낮과 밤의 자아를 통해 사회 생활의 염증을 치유하기 위한 일탈 과정을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사회라는 전선을 뚫고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 갖가지 불치병을 치유하는 모임에 중독되어 불면증을 해소하는가 싶더니, 일대일 싸움 조직인 이른바 '파이트 클럽'에 발을 들입니다. 그 곳에서 소비문화에 매몰된 자본주의에서는 억눌려 있을 수 밖에 없는 남성성의 불안심리를, 폭력과 섹스 그리고 테러로 표출합니다. 하지만 한 인물이면서도 두 환각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은 끝내 자신의 목구멍에 총구를 겨눕니다.
재수생 시절, 이 영화를 우연히 봤을 때는 정신병자들의 상태를 대변해주고 이들의 심리를 일반인들에게 피력하기 위한 영화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파이트 클럽'은 작금의 제 상태를 대변해주고,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영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화는 미치지 않고서는 적자생존의 경쟁의 장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사회는 그 명제를 신봉하는 정신병자를 양성하는 거대한 정신병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내면의 괴물(타일러)을 총으로 쏘기 전, 타일러(자신의 이상적 자아)가 폭발물을 설치한 카드회사의 펜트하우스에서 서로 나눈 대화는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던졌습니다.
"네가 날 원하지 않았다면 난 애초에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야, 내 덕에 넌 사람 됐어!"
"힘든 순간과 좌절이 없었더라면 사라져버린 어릴 적 감수성이 그리워지기라도 했을까. 그 덕에 지금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걸지도..."
해병대 입대 후, 100일 휴가를 나와 버스의 창가 너머로 바라본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아름답고 깨끗하게 느껴졌습니다. 2박 3일간의 초고속 휴가를 보내고 자대에 복귀하기 전, 거울에 비친 저의 눈빛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망울처럼 보였습니다.
회사 업무와 이해관계의 스트레스에 짓눌려 내내 의기소침할 때 울타리 밖 세상의 햇빛은 회사 안에서는 뙤약볕입니다. 하지만 회사 정문을 벗어났을 때는 따뜻한 햇살로 살갗을 비춥니다. 인간을 억누르는 구속과 해방. 하지만 구속과 해방이라는 굴레 속에서 어쩌면 '행복'이라는 신기루가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놀이터에서도 사회에서와 같이 생존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하고 때론 같은 편이 되어 선동하기도 하였죠. 그때 즐겨 부르던 '놀이'라는 행위가 지금은 '일'로 변했지만, 놀면서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과 '재미'라는 보상이, 대가를 염두에 두고 일하는 지금은 '보람'과 '안도감'이라는 위안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보던 낯선 만화나 영화에서 느꼈던 호기심과,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인해 더욱 쉽게 끓어오르곤 했던 내 안의 섬세한 감수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매일 거울 앞에서 ‘오늘도 출근해야 하는가’를 고뇌 하며, 대문 앞에서 발걸음 떼기가 무겁기만 한 일상에서 어린 시절의 때 묻지 않은 안경을 다시 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화 속 타일러처럼 사회 속에서 무의식 중에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일상들을 하나씩 파괴해버리는 일탈을 시도해야만 할까요?
내 안의 폭발직전의 자아, 타일러의 사디즘, 마조히즘의 변태적 폭력행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는 지금 '깨알 일탈'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학교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던 자격에 낙심. 꼭 일해보고 싶었던 분야의 회사에 낙방. 항상 상사에게 타박 당하면서도 다음날은 멀쩡한 얼굴로 다시 출근해야 하는 사회의 노예가 잠깐 동안만이라도 자신 속에 잠들어 있는 타일러의 말에 귀 기울여 봅니다.
...(중략)
생활의 그악스러운 손아귀에서도 나는 신음하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우연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천국의 문이 아무리 좁아도 저승의 명부가 형벌로 가득 차 있다 해도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내 영혼의 선장임을.
- '굴하지 않는다.'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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