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특집 2부] 동양의 좀비 ‘강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뒷이야기들

Story/효성





영화 <부산행>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선전 중입니다. 서구의 좀비(zombie)를 국내 정서와 이질감 없이 이식한 기획력과 스토리텔링이 특히 호평을 받고 있는데요. 덩달아 좀비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좀비란 ‘걸어다니는 시체’를 일컫습니다. 아이티(Haiti) 민간신앙인 부두교(Voodoo) 전설에 주술력으로 되살아난 시신이 등장하는데, 이 존재가 현재 좀비의 원형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동양의 ‘강시(僵屍)’는 여러모로 좀비와 닮았습니다. 움직이는 시체이고, 산 사람을 물어뜯고, 여간해서는 제거하기가 어렵죠. 현재 30~40대 분들이라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선풍적 인기를 구가한 강시 영화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웃음과 공포가 적절히 배합된 코믹 액션물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당시 국내 TV 프로그램들에서도 강시로 분장한 배우, 코미디언 들이 심심찮게 출연해 웃음을 주곤 했죠. 아마도 이런 까닭으로, 좀비와 상대적으로 강시 쪽은 좀 더 만만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하지만 강시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면, 역시 ‘인간적’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강시란, 그 이름처럼 어쨌든 죽은 자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기기묘묘하고 서늘한 강시의 역사를 알아봤습니다. 




  강시를 이해하는 3가지 배경지식


우리가 기억하는 강시의 전형성이란 대개 이런 요소들의 집합체입니다. ①이마에 붙은 부적, ②중국식 관복, ③‘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쿵쿵 뛰는 이동 모습. 기괴한 이 세 가지 특징들은 아무 근거 없는 창작의 산물이 아니라, 동양의 전설에 기인한 모티프(motif)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① 부적

영화 <곡성>에는 박수무당의 굿판을 묘사한 장면이 나옵니다. 배우 황정민 씨가 연기한 무속인 캐릭터는 칼춤을 추거나 펄쩍펄쩍 제자리뛰기를 하며 신과 영접하려 하죠. 그 과정 중 하나가 부적(符籍)을 쓰고 특정 대상의 신체에 붙이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부적은 주술의 도구로서 사용되어왔죠. 복을 기원하거나 액운을 물리치는 용도입니다. 


2015년 홍콩의 핼러윈데이 프로모션 행사장에 등장한 강시 캐릭터 

출처: BusinessInsider


그렇다면 강시 이마에 붙은 부적은 어떤 주술력을 띄는 걸까요? 중국의 강시 전설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전장이나 타지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주검을 그들 각자의 고향으로 운구해주고자 고심했답니다. 직접 옮기기엔 너무나 고됐으므로, 도술을 부리는 이의 힘을 빌리기로 했죠. 시신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이에 도사(道士)들은 주검의 얼굴에 영험한 부적을 붙여 이동할 수 있게 했죠. 하지만 소생이라 할 수는 없고, 단순히 ‘동작하는 시체’일 뿐입니다. 고향에 당도하면 부적의 효험은 다하므로, 다시 영원히 눕게 됩니다. 다만 문제는, 효력이 발동 중인 상황에서 부적을 뗄 때 발생합니다. 업데이트 진행 중인 PC를 강제 종료시키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고향에 못 간 망자의 시신에는 원혼이 깃드는데, 부적은 그 원혼을 위한 일종의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부적이 이마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강시의 폭주가 시작되는 것이죠. 이때부터는 도사의 통제를 벗어납니다. 심각한 재앙이 초래됩니다. 좀비처럼 강시도 멀쩡한 사람의 몸을 물거나 흡혈합니다. 그렇게 산 사람이 강시가 되고 말거든요. 사태 수습책은 오직 하나. 강시의 이마에 다시 부적을 붙이는 것. 



② 중국식 관복

강시 이야기는 중국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까지 유행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영화나 소설 속 강시들이 대부분 청나라 관복을 착용한 연유라 할 수 있습니다. 강시를 소재로 한 청나라 문헌들 중 흥미로운 작품 한 편을 잠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9세기 청조 시대가 배경인 영화 <명장>의 세 등장인물

출처: War-Films.info


영화 <강시선생>에 묘사된 강시

출처: Listal.com


중국 소설가 루쉰(魯迅, 노신)은 1700년대 청나라에서 활동한 ‘기윤’이라는 학자를 극찬한 바 있습니다. 기윤은 중국의 고대부터 당나라 때까지의 지식과 서적을 망라한 총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집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노년에 또 한 권의 저서를 편찬했는데, 이름 하여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입니다. 여우 혹은 귀신이 등장하는 수십 편의 기담들로 구성된 책으로서, 이야기의 형식을 빌어 당시 만연했던 불의와 부정을 꼬집고, 탐관오리들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에 여자 강시가 등장하는데요. 어느 노인이 길가에 쓰러진 아녀자를 구해 집으로 데려왔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강시였습니다. 기겁한 마을 사람들은 당장 그 여자를 없애라 하지만, 노인은 강시를 딸처럼 대하고 ‘윤윤’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에 감동한 강시는 노인을 진심으로 따르며, 마을에 쳐들어온 도적들을 물리치기까지 하죠. 강시 윤윤은 노인이 죽고 난 뒤에도 50년간 마을을 수호하다가 홀로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국내 출간된 <열미초당필기>

출처: 알라딘


우리에게 익숙한 강시는 대체로 사람을 놀래키거나 해하는 존재로 그려졌는데, <열미초당필기>의 윤윤은 오히려 사람보다 나은 강시로 묘사되고 있죠. 한낱 요괴도 이렇듯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데, 정작 사람이 돼서 귀신보다 더 독살스럽게 서로를 불신하고 해하면 되겠느냐는 메시지도 읽히는군요. 



③ ‘앞으로 나란히’ 자세

강시는 기본적으로 시체이므로,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습니다. 관절이 꺾이지 않으니 손짓 발짓이 불가능하죠. 이런 물리적 제약 탓에 강시는 양팔을 쭉 뻗은 몰골로 쿵쿵 뛰어다닐 수밖에 없답니다. 하지만 악력은 괴이할 만큼 세서, 강시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히면 빠져나가기가 힘듭니다. 


강시 상상도

출처: ferrebeekeeper.wordpress.com


정상인과 동일한 상태로 깨어나도록 주술을 걸었으면 됐을 텐데요. 비범한 도사들이 이 점을 간과했을 리 만무합니다. 즉, 의도적으로 강시의 동작에 구속력을 가한 것이라는 뜻이죠. 꽤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송장이 산 사람처럼 움직일 경우, 당연하겠습니다만, 송장과 산 사람의 구분이 어려워집니다. 물론, 얼굴에 부착된 부적을 지표로 삼으면 되겠지만, 만에 하나 부적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해집니다. 몰래 도망쳐 사람 행세를 하는 강시를 무슨 수로 색출하겠나요. 아마도 도사들은 이런저런 상황들을 예측하여 강시들의 동작 형태를 결정했을 듯합니다. 또한, ‘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대열을 이룬다면 인원 수, 아니, 강시 수 파악이 훨씬 수월하리라는 점도 고려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공포와 추억이 혼재된 존재, 강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수놓았던 홍콩의 강시 영화들을 떠올려봅니다. <귀타귀>, <강시선생> 시리즈, <강시도사>, <3세강시>, <강시소야>, <강시번생>, <헬로 강시>, <강시와 부시맨>, ∙∙∙. 강시 영화 붐의 효시라 평가받는 <귀타귀>와 <강시선생> 시리즈 이후, 실로 숱한 아류작들이 쏟아졌습니다. 3040세대는 ‘강시 세대’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2000년대 접어들며 요괴 캐릭터의 바통은 좀비에게로 넘어간 듯 보입니다. 오래전 강시 영화들이 그랬듯, 지금은 다종다양한 좀비물들이 제작되고 있죠.

이런 와중에 몇 년 전, 반가운 강시 영화 한 편이 등장했었습니다. <강시: 리거모티스>라는 제목인데요. <강시선생> 시리즈의 주역이자, 여러 무술 영화들에도 출연했던 80년대 홍콩 스타 전소호(錢小豪)가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강시를 그리워 하는(?) 세대들이라면 상당히 반겼을 법한데요. 


2013년작 <강시: 리거모티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흘러 좀비가 식상해져갈 즈음,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다시금 강시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봅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조명되고 재창조될 강시의 이미지는 어떠할지. 열대야가 계속되는 요즘, 추억의 강시 영화 한 편과 함께 더위를 잊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