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조석래 회장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 현장의 목소리에 늘 귀 기울이시던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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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래 회장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3편


석래 회장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일할 때입니다. 당시 국제회의에서 조 회장님이 연설할 원고를 제3자를 통해 내게 한번 검토해달라고 부탁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원고의 내용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큰 주제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 회장님께서는 연설문에서 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적 측면과 지역경제 및 기업 간 국제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셨죠. 당시 나는 사업하는 분의 연설문치고는 내용이 매우 폭넓고 분석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국제 경제 관계 분야의 저명한 학자나 정부 대표의 연설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조 회장님은 내가 검토한 후에도 연설문을 여러 번 수정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국제회의에서 발표할 연설문이라 해도 누구보다 바쁜 CEO가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쓴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국내외 회의에서 조 회장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2003년 내가 효성의 사외이사에 선임되면서부터 조 회장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20여 년 전에 가졌던 조 회장님에 대한 첫인상을 이사회와 해외 공장 방문에서도 변함없이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분기별로 개최되는 이사회에서는 그룹 전체와 사업 분야별로 실적과 전망을 논의하고 주요 안건들을 처리합니다. 조 회장님은 내가 사외이사로 있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사회에 참석하셨죠. 통상적인 보고와 안건 처리 외에도 조 회장님께서는 여러 측면에서 참석자들로부터 의견을 듣고 토론하기를 좋아하셨는데요. 효성 이사회에서는 세계 경제 환경 변화, 동북아 정세와 남북 관계, 한국 경제의 전반적 상황, FTA 체결과 환율변동이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주제를 논의했습니다. 특히 한미 및 한일 경제 관계에 큰 관심을 보이셨으며 당신의 생각도 공유하고자 토론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사외이사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하셨는데, 이러한 논의를 할 때는 대학원에서 세미나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2005년에 전체 이사진이 중국 청도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효성에서는 처음으로 해외에서 이사회를 개최하고 현지 공장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공장을 견학할 때 조 회장님은 기계 가동 상태, 주변 시설, 현지 노동자들의 손놀림 등을 꼼꼼히 살피고 질문도 많이 던지셨는데요. 이사회와 공장 시찰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는 만찬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다들 차에 올랐는데, 조 회장님은 공장을 더 둘러보겠다면서 혼자 남으셨습니다. 시간을 내서 해외 공장을 방문했으니 궁금한 것들을 실무자들과 함께 직접 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해외에서 고생하는 현장 직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를 한 번 더 만들어보려고 하신 것이었겠죠. 결국 같이 갔던 다른 사내이사들과 사외이사들은 조 회장님만 남겨놓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당시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직접 이해하겠다는 조 회장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고, 또 하나는 다른 직원들에게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매우 편하게 대해주시는 조 회장님의 열린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기업들의 풍토를 전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해외 공장을 방문해 그룹의 회장만 공장에 남고 동행한 모든 사내이사들이 사외이사들과 함께 휴식과 자유 시간을 갖는 경우는 아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후 저는 2008년 터키 이스탄불 스판덱스 공장에서 있었던 이사회와 2010년 베트남 호찌민시티 타이어코드 공장에서 개최된 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두 번의 해외 이사회에서도 조 회장님은 이사회와 공장 방문이 끝나면 혼자 남아 더 공장을 둘러보았고 동행한 다른 사내이사들은 사외이사들과 자유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 회장님께서 보여주신 일에 대한 열정과 직원들을 향한 따뜻한 모습이 일과성에 그치지 않고 일관되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 회장님께서는 일과 더불어 항상 세계 정치 경제, 아시아 태평양 및 동북아 정세, 한미 및 한일 경제 관계 발전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해 직접 공부하고 전문가들과 토론하셨습니다. 아마도 21세기 글로벌 환경 속에서 다양한 국제 이슈들이 국가 경제는 물론이고 기업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는 CEO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대학을 방문해 교수·학생들과 간담회를 갖고 특별 강연도 하셨어요. 저명한 해외 인사가 대학에서 강연할 때는 시간을 내서 직접 참석하시곤 했죠. 이처럼 20여 년간 가까이서 보아온 조 회장님은 아주 학구적인 CEO였습니다. CEO가 아닌 학자의 길을 택했어도 조 회장님은 충분히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으리라 생각이 드네요.



* 본문 기사 내용은 조석래 회장의 업적을 기리는 기고문집 <내가 만난 그 사람, 조석래> 발간을 기념해 일부 내용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박태호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의 글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박태호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1994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2005년 한국국제통상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6년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원장, 2007년 지식경제부 무역위원회 위원장, 2011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