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에 올라 사랑을 외치다.
언뜻 보기에 그에게는 배낭여행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느낌보다는 올곧은 모범생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이었지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채 이집트의 혼잡한 거리를 활보하기 보다는 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여의도의 증권가를 누비는 편이 훨씬 어울려 보이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마흔은 넘겼으리라 추측하게 만드는 희끗희끗 눈에 띄는 새치와 이마에 살짝 패인 주름살도 한 몫을 했지요. 배낭여행이라는 건 왠지 뜨거운 젊은 피의 소유자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법이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이가 둘이나 되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여의도에 위치한 금융 회사에서 일을 하는 중년의 평범한 직장인이었고요.(이쯤 되면 돗자리를 깔아도 되는 게 아닐까요?) 그때부터 저의 의문은 다시 꼬리를 물기 시작했지요.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은가? 아니면 실직이라도 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휴가철도 아닌 이 때에 홀로 이집트까지 여행을 올 리가 없잖아. 배낭여행자 숙소에 머무는 것을 보니 분명 출장도 아닐 테고 말이지.
그런 의문은 그날 밤을 채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맥주인 스텔라(Stella)의 도움을 살짝 받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그는 젊은 시절 배낭여행을 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답니다.(누구나 한번쯤 꿈꿔보는 낯선 장소에서의 로맨스!) 둘 다 여행을 좋아하기에 결혼 후에도 종종 여행을 떠나곤 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매년 서로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답니다. 즉, 여행만큼은 혼자 떠나는 거지요. 간만에 주어지는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답니다. 회사는 꼭 여름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때엔 휴가를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고요.(이런 배려는 효성과 마찬가지네요 ^^)
홀로 혹은 아내와 함께 여행한 많은 장소 중에서도 이집트는 그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바로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이니까요. 오래 전이었지요. 피라미드에 올랐지요. 땀을 식히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국인, 반가움에 인사를 건넸던 그녀가 바로 지금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유난히 피라미드 사이로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해요. 몇 년 전 책으로 그리고 영화로 인기를 끌었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인용해 가며 저는 호들갑을 떨었지요. 그날 밤 내내 영화의 OST는 귓가를 맴돌았고, 영화의 배경이 된 에어즈락의 붉은 환영은 눈을 감아도 선명했습니다. ‘우리 언젠가 저곳에 꼭 같이 가자.’ 함께 영화를 봤던 친구와 나눴던 약속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입니다.
며칠 후, 저는 피라미드를 찾았습니다. 모래 바람이 흩날리는 것은 오래 전 그날과 같았을 텐데 어느 이상 피라미드에 오를 수는 없었어요. 피라미드에 올라가다가 떨어져 다치거나 죽는 사고가 많아서 언젠가부터 금지되었다고 하네요. ‘그들의 만남은 정말 운명이었나 봐.’ 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오를 수 없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고 보면 사랑을 그려내는 많은 영화들이 왜 그리도 높은 곳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될 법도 합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는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요. 여기 피라미드 하나 더 추가입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저는 피라미드를 떠나왔습니다. 고대에 지어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피라미드는 거대했지만 저에게는 다만 그 뿐이었습니다. 그에겐 너무도 특별한, 그래서 오랜 시일이 흘러도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 힘이 있는 피라미드가 제게는 하나의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지요. 여행은 그렇습니다. 낯선 곳에서 어떤 이는 로맨스 소설을 쓰고, 어떤 이는 액션 영화를 찍습니다. 때로 어떤 이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는 풍경이 될 뿐이기도 하지요. 그 다양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때론 너무 밋밋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해도, 때론 흥행에 실패한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다음 번엔 어떤 장르의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 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 나만의 이야기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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