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sung Blogger] 모모리의 여행이야기(8) 이 가을을 보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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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땅을 보며 걷고 있을 때였어요. 콧속을 파고드는 강렬한 내음, 기습적인 공격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은행나무가 길을 따라 주욱 늘어서 있습니다. 범인은 은행나무 열매였던 거지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한창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은행나무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한층 화려하게 빛을 냅니다. 때마침 보름달이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습니다.

‘아, 가을이구나!’ 왠지 모를 짧은 탄식에 이어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어렸을 적 부르곤 했던 동요가 절로 흘러 나옵니다. 발걸음을 한 템포 늦추어 자박자박 걷다 보니 마음 한 켠에서 꼬물꼬물 올라오는 하나의 바람 ‘아, 떠나고 싶다!’

 

실은 불과 얼마 전에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울릉도로.
“육지에서 왔는교?” ‘
정작 육지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육지’라는 말이 참으로 생경합니다. 울릉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가는 그네들에게는 나에겐 익숙한 ‘섬’이라는 말이 그렇게 들릴까요? 울릉도 주민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너무 일찍 왔다고. 몇 주만 더 늦게 오지 그랬냐고. 울릉도의 완연한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빛을 반짝거리며 열심히 설명하네요. 초가을 햇볕을 야금야금 먹으며 오징어들이 탐스럽게 말라갑니다.


 

혼자가 아닌 동행이 있는 여행도 오랜만이에요. 동행들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울릉도의 별미인 홍합밥, 따개비밥, 오징어 내장탕 등을 찾아 나섭니다. 섬의 해안을 따라 택시 관광을 하기도 하고 로컬 버스를 타고 느릿느릿 주변 경치를 즐기기도 합니다. [1박 2일]에서 엄태웅의 레이스가 빛났던 장소를 되짚어 가며 산책을 합니다. 울릉도의 풍경을 두 눈에, 마음에, 사진에 열심히 담아봅니다.

날씨와 파도는 별개인가 봐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날인데도 높은 파도로 인해 독도로 들어가는 배는 뜨지 않습니다. 파도를 원망해보지만 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눈 앞에 넘실거리는 저 푸른 바다는 독도와 연결되어 있겠지요.다음 날, 나의 터전 ‘육지’로 돌아가기 위해 항구에 갔을 때 이번에도 높은 파도는 바닷길을 막습니다. 이번엔 파도에 꾸벅 인사라도 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아름다운 땅에 조금 더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날 밤엔 흑비둘기 서식지 근처에서 야영을 했어요. 몇 미터 지척에 바다가 있습니다. 울릉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며 술잔도 한 잔 기울입니다. 며칠간의 여행이 고됐던 걸까요? 하나둘 잠을 청하러 텐트로 들어갑니다. 파도소리가 자장가가 되어줄 테지요.
저는 담요를 한 장 걸치고 근처 테트라포트로 다가갑니다.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누워버립니다. 오징어잡이 배들의 환한 불빛이 바다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빛은 하늘에도 닿아 하얀 구름을 이 늦은 시각에도 또렷이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산을 넘어온 구름은 빠른 걸음으로 바다쪽으로 나아갑니다. 환한 탓에 밤하늘 별은 생각만큼 많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 더 많은 별이 숨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엔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함께 떠난 여행에서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가 되어 버린 시간, 그간 여행하면서 마주했던 수많은 밤을, 그 별을 떠올려 봅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몽골의 초원에서, 호주의 국립공원 산 속에서, 히말라야 산맥의 그 어디쯤에서 만났던 밤하늘을 말입니다. 그 풍경들 속엔 이십대의 청춘인, 서른을 막 시작한, 불과 얼마 전의 내가 있습니다. 아뿔싸. 여행을 떠나와서조차 나는 지난 여행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잎을 물들이고, 열매도 실하게 익히는 가을은 우리의 마음도 촉촉히 물들일 겁니다. ‘아, 가을이구나!’ 짧은 탄식이 터져 나올 때 어쩌면 ‘떠나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지난 여행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 길을 걸으며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울릉도 여행을 제가 추억했듯이.



 

실컷 외로워해도 좋겠습니다. 눈물 한바탕 쏟아내도 괜찮습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볼 용기를 내도 좋겠습니다. 평소의 나답지 않으면 어떻습니까?‘가을’을 핑계 삼는 거지요.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될 만큼 대한민국의 가을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니까요.

울릉도에도 가을이 오고 있겠군요. ‘섬’사람들이 ‘육지’사람들에게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던 울릉도의 가을 말입니다. 이 밤에도 오징어잡이 배들은 바다를 밝히고 흰구름은 바다를 향한 달음질을 멈추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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