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권] 일차원적 사고 탈피 매뉴얼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10월 ‘한 달의 한 권’ 코너에서 준비한 책은 9월에 나온 신간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출간한 최초의 만화 철학책’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띄는데요. 교육학자이자 만화가인 닉 수재니스(Nick Sousanis)의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원제: Unflattening)입니다. 지난해 하버드 대학 출판부를 통해 미국 독자들과 만난 뒤, 올가을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미국도서관협회는 이 책을 ‘주목할 만한 학술도서’로 선정했고,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는 최고의 그래픽노블이라 호평했다고 하는군요. 

책 제목 ‘언플래트닝’은 간결하고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고정된 틀 안의 원오브뎀(one of them)을 자초해버린 현대인들을 깨우는 알람이죠. 본문 내용을 인용하자면 “북쪽만 알고 위쪽은 모르는”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라는 정언 명령이기도 합니다. 

 

 

출처: 유투브 @책세상(https://goo.gl/tkT69u)

 <매트릭스>의 네오가 된 기분

‘단조로움’이라 명제된 1장에서는 에드윈 애벗(Edwin Abbott)의 소설 <플랫 랜드(Flat Land)>의 세계관을 통해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가 전개될 방향성을 개괄하는데요. 평면도형에 불과한 ‘정사각형’은 삼차원 세계에서 왔다는 ‘구’의 인도를 받으며 일차원 세계인 ‘플랫 랜드’를 탈출합니다. 그렇게 정육면체로 거듭나고, 궁극에는 제한된 차원을 뛰어넘어 ‘생각의 나라’로 가 닿을 수 있게 되죠. 저자가 <플랫 랜드>의 비유로 건드리고자 하는 바는, 주인공 사각형처럼 우리 또한 “관점의 한계라는 틀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는 점입니다. 어쩐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된 기분인데요. 내가 지금껏 보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입체가 아닌 평면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받아들임이 못내 불편하고 불쾌하다면, 아마 이 책의 다음 장을 읽는 일은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왜 만화인가 

이 책은 메시지 전달 형식으로 ‘만화’를 채택했습니다. 저자가 만화가라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닉 수재니스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듭니다. 3장 ‘생각의 형태’는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두 가지 표현 수단에 대한 사유로 채워져 있는데요. “한 장의 그림은 수천 마디의 언어만큼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를 제기한 뒤 저자는 “가능하다”고 답합니다. 

이미지는 ‘존재 자체’를, 텍스트는 ‘어떤 견해’를 표현한다. _ 본문 중

이미지적 표현 수단에의 이야기는 이내 ‘만화’로 옮겨 갑니다. 그래픽노블, 그림문자, 망가, 방드 데시네, 푸메티 등 다양한 타이틀 혹은 장르로 세분화된 만화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만화라는 명칭이 있기 전부터 이미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죠. 고대 암각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자는 또 이렇게 부연합니다. 언어가 단어-문장-문단의 구조적 결합을 통해 위계적, 조직적으로 ‘어떤 견해’를 표현한다면, 그림은 뿌리줄기처럼 서로 얽히고설킨 리좀적(rhizomatic) ‘모습들’로써 ‘존재 자체’를 단번에 드러낸다고 말이죠. 

이렇듯 텍스트와 이미지의 차이를 설명한 이유는 자명합니다. 한 가지 표현 수단에만 얽매이지 말고, 지레 구분선부터 그어놓지 말고, 다차원적으로 사고하고 나타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저자는, 선형적 표현 수단인 텍스트의 한계를 그림(만화)이 극복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문자가 표현하지 못 하는 것들이 그림을 통해서는 가능하다는 긍정이죠. 

텍스트와 이미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이끌리는 동안, 독자로서 ‘나는 나를 어떻게 표현해 왔나’ 하는 묵직한 질문을 품게 됩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 안팎에서 얼마나 다양한 표현 수단을 동원해 나 자신을 드러냈었는가에 대한 고민도 해보게 되고요. 

이미지와 텍스트의 분리··· 여기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우리 사고에는 또 다른 차원이 열린다.  확장된 수평선 너머로 형체가 드러난다.  표현과 발견의 수단으로서 그 자신만의  형체를 완전히 갖춘 채로. _ 본문 중

 성숙한 어른, 피터팬

영화 <후크>에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 네버랜드를 떠나 현실 세계의 배 나온 어른으로 나이 들어버린 피터. 자신이 한때 하늘을 날던 ‘피터팬’이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 하죠. 요정 팅커벨은 조언합니다. 가장 즐거웠던 일을 생각해보라고. 피터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을 가만히 떠올리며 빙긋이 웃습니다. 그 순간, 피터는 깨닫죠.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어른 피터를 다시 피터팬으로 되돌린 것은 바로 동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재 피터팬’은 아무런 경계도 제한도 없이 훨훨 비상합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힘으로 악당 후크 일당을 무찌르고, 네버랜드의 아이들과 평화를 이루고는 다시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현실 세계로 귀환합니다. 네버랜드라는 이상향과 현실 세계 양쪽의 균형을 성공적으로 맞춘 것이죠. 

오늘 소개해드린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이 시대 모든 어른들에게 다시금 피터팬이 돼보라고 독려하는 책입니다. 고용주(자본가)와 고용인(노동자)의 관계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틀에 박히지 않은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 틀을 단호히 벗어나는 일 또한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걸까요? 이 책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목적으로 모든 사회적 유대를 끊을 수는 없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상태로는 그저 부유하게 되고,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로부터 분리될 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에 따르면 진정한 해방은  ‘유대로부터의 탈피’가 아닌 ‘진정한 결속’이다.  연결망의 끈은 계속 이어진다.  보다 많은 연대의 끈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결속을 제약이 아닌 동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_ 본문 중

<후크>의 결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네버랜드의 아이들, 현실 세계의 가족, 피터팬은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지 않았죠. 오히려 그는 양쪽 모두와 “진정한 결속”을 이루었습니다. <플랫 랜드>의 사각형이 정육면체가 되고, 뒤이어 무차원의 자유를 얻었듯, 피터는 ‘네버랜드의 피터팬’과 ‘현실 세계의 피터’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낡아간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 이유 모를 매너리즘 탓에 일도 일상도 ‘플랫’하기만 할 때,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가 적절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언플래트닝’의 변혁이 찾아오길 바라며- 

지난 ‘한 달에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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