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좋아하기로 결심한 마음,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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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마음처럼 흐르지 않을 때 대부분은 상황을 탓합니다. 하지만 고규홍 나무 인문학자는 어떤 상황이든 틈은 있고 그 틈을 찾는 건 각자의 몫이라 말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를 찾는 의지, 하기로 한 것을 밀고 나가는 마음, 어쩌면 그건 틀에 박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도전 아닐까요.

 

 

 여과 없이 시간을 담는 존재

 

익숙한 것은 귀한 줄 알기 어렵다. 고규홍 나무 인문학자도 그랬다.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던 시절, 직장과 집 사이를 오가는 동안 많은 나무를 그냥 스쳤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던 대상. 하지만 관심이 생기니 귀해졌다. 평생 자신의 이름 곁에 ‘나무’가 따라다닐 줄은 그도 몰랐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사랑이 됐다. 그리고 업이 되고 소명이 됐다. 나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 겨울에 핀 목련꽃을 봤어요. 신기한 마음에 이런 주제에 대해 써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죠. 식물을 통 모르던 때니까 제가 잘 아는 문학이나 신화와 묶어 나무 이야기를 구성하고 인터넷으로 메일링하는 서비스를 했어요. 글로 먹고살았던지라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 소일 삼아 해보자 싶었던 건데, 이렇게 직업이 되어 벌써 18년째 나무를 탐구하고 있네요.”


얼마 전 그는 지인에게서 “우리나라에서 고규홍 학자보다 나무에 대해 더 아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더 많이 얘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30여 권에 달하는 나무 관련 책을 펴내고 나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으면 마다치 않는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의 가치를 알리고 싶은 마음. 노거수(老巨樹)를 주로 찾아다니는 고규홍 학자는 나무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에 주목한다.  


나무는 세월의 깊이만큼 아름답다. 묵묵히 한자리를 지키며 갖은 풍파를 감내한 덕분이다. 사람이라면 부러 찾는 고행이 나무에게는 삶 자체다. 그래서 나무 곁에 서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거대한 존재만이 줄 수 있는 위로. 기껏 100년 사는 인간에게 400년 넘는 세월을 산 나무가 해줄 이야기가 얼마나 무수할까. 오래된 마을이라면 으레 간직한 신화엔 이런 나무를 지키기 위한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 “늙어가면서 점점 아름다워지는 생명체는 나무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픈 고규홍 학자의 바람 또한 조상들의 그것과 같다. 마을 천덕꾸러기였던 감나무의 가치를 발견하거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물푸레나무를 찾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도록 한 일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이었다.

 

 

 

 필요한 건 관심과 성의

 

나무 답사를 시작하고 첫 10년은 힘들었다. 나무는커녕 환경에 대한 관심조차 미비하던 때, 5년 동안은 신나서 몰입했지만 점점 밥벌이하기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인생 2막의 문 반쯤을 나무로 열어둔 상태였다. 불확실하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마냥 즐겁진 않아도 좋아하는 그 마음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자료가 없어 문화재청과 산림청에 등록된 천연기념물과 보호수 위주로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3,000여 그루의 데이터가 쌓였다.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 꼼꼼히 살피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묻고 파헤친 결과물이다. 꿈이 있다면 언젠가 이 나무들을 망라한 나무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낸 책에는 최고 좋은 나무들 위주로 담았지만 질이 조금은 떨어지더라도 300년, 400년을 살아온 그 시간만으로 유의미한 나무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단다.


“얼마 전 답사했던 곳을 다시 찾았는데 그 동네 나무에 얽힌 전설을 말씀해준 어르신이 돌아가신 걸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전설을 모르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없어진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니겠죠. 쉬운 작업은 아니겠지만 그래서라도 꼭 전국 나무 지도를 만들고 싶어요.”


최근 고규홍 학자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와 함께 나무 바라보기를 진행한 이야기를 엮은 책 <슈베르트와 나무>를 출간했다. 눈이 아닌 온몸으로 나무를 느끼는 그녀를 보며 개개인이 다르다는 것, 접근 방법이 서로 다른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무는 우리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마음을 열면 느낄 수 있는 무한을 제공한다. 관심과 성의만 있다면 보지 못한 세상이 열릴 것이다. 고규홍 학자가 그랬듯이 말이다.

 

 

글 | 진현영

사진 | 전문식(Day40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