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고양이! 등산! 의 공통점은? 30대 싱글녀를 홀리는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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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싱글녀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에 열심을 내게 된다. 종교, 고양이, 등산

 

 

어느 책에선가 발견한 내용인데,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어머, 이건 완전 내 얘기잖아!’ 무릎을 쳤더랬지요. 교회도 꾸준히 다니고 귀여운 고양이라도 발견할라치면 에고 귀여워라, 눈길을 한참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30대 들어서 가장 열심을 내는 것은 다름 아닌 등산입니다. 그래요, 저에게도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20대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도 싫어했지만 단체 생활이라 어쩔 수 없이 산을 오르게 되더라도 운동화에 후드티, 청바지 차림이었지요. 아저씨, 아줌마들이나 입는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어찌 세상을 활보한단 말입니까? 그랬던 제가 이제는 등산복 매장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비싼 가격 탓에 사고 싶은 대로 모두 질러 버릴 수는 없지만 옷장 한 켠에는 절기마다 하나씩 등산복 옷가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등산에 열심을 내는 30대의 싱글녀입니다.

 


 

 

 

 

 

 

4월의 첫 주말은 남도 여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행’이라는 테마를 달았지만 주목적은 통영의 ‘사량도’라는 섬에 자리잡은 지리망산 등반입니다. 밤새 한반도를 종으로 가로질러 이른 새벽 통영에 이르렀지요. 충무김밥에 라면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사량도’로 들어가는 배에 오릅니다. 뱃멀미가 따라오는 건 아닐까 살짝 염려를 하기도 했지만 왠걸요. 온돌방처럼 좌식으로 꾸며진 따뜻한 선실에 밤새 차 안에서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누우니 스스로 감겨오는 눈. 살짝 감았다 떴을 뿐인데 벌써 도착이랍니다.

 

 

 

 

 

 

 

 

 

 

섬의 이모저모를 알려 주시는 운전 기사 아저씨의 명쾌한 설명과 함께 버스는 등산로 입구를 향해 꾸물꾸물 나아갑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입니다. 꽃봉오리만 빼꼼히 내민 늑장꾸러기 녀석들과 만개한 꽃을 팝콘처럼 주렁주렁 매단 성질 급한 녀석들이 엎치락뒷치락하며 해안 도로를 수놓고 있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 구절이 있지요. 아마 시인은 4월의 아름다운 벚꽃나무를 본 적이 없을 겁니다. 4월은 분명 황홀한 달입니다.

 

 

 

 

 

 

 

 

 

 

해발 398미터의 지리망산은 비록 높지는 않지만 제법 산세가 험한 편입니다. 지리망산을 거쳐 가마봉과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암릉 구간에는 깎아지른 듯한 경사에 밧줄과 철제 계단이 연이어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지요. 그러나 이곳에서 진정으로 빛나는 것은 산이 아니라 바다, 한려 해상이죠. 지중해 부럽지 않은 물빛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쪽빛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이 만들어 내는 장관은 산을 오를 때, 능선을 따라 걸을 때,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볼 때.. 어느 순간에라도 다른 표정을 건넵니다. 한 무리의 외국인 그룹이 왔습니다. 빼어난 경치에 ‘어메이징’을 외치는 그네들 곁을 지날라치면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어깨도 으쓱합니다. 그래요. 난 자랑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말이죠.

 

 

 

 

 

 

 

 

 

산에서 일행들과 나누어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맛이 좋습니다. 인스턴트 커피도, 컵라면도, 차갑게 식어버린 김밥마저도 5성 호텔 음식 남부럽지 않게 대접 받는 곳은 바로 산 정상 위지요. 제가 산을 찾게 된 건 나이가 들면서 자연이 좋아진 탓도, 또 산에서 먹는 꿀맛 나는 음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산이 갖는 스포츠로서의 매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 도봉산을 오를 때였어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두 분이 제 뒤를 따르며 담소를 나누고 계셨지요.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등산이 다른 스포츠와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1등도 없고, 꼴찌도 없고, 패자도 없다는 거야. 그냥 오르고 싶은 속도로, 오르고 싶은 만큼만 올랐다가 내려가면 그만이거든. 등산이란 스포츠에서는 누구나 승자야.”

 

그 말에 그만 홀딱 반해버린 겁니다. 경쟁할 필요 없이 누구나 승자가 되는 스포츠.


한껏 눈을 즐겁게 해 주었던 몇 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배를 타고 다시 뭍으로 나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살짝 눈만 감았을 뿐인데 도착이래요. 참으로 마법의 배,입니다. 일행들과 해수 사우나에 들러 쌓인 피로를 풀어 내고 통영과 이웃하고 있는 거제로 향합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펜션에 짐을 풀고 옥상에서 숯불 바베큐 파티를 벌였죠. 바다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보름달은 손 닿으면 잡힐 듯 하고, 우리의 웃음은 숯불 연기와 더불어 하늘 위로 모락모락 솟아 오릅니다. 숯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고구마는 오늘의 별미입니다.

 

어느덧 깊은 밤, 길었던 하루를 마감하며 자리를 펴고 누웠죠. 두근거리는 심장,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찰나, 간질간질하는 벚꽃나무가 된 기분이에요. 여행은, 봄날의 여행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임이 틀림 없습니다. 도무지 잠들 것 같지 않던 밤이었는데, 눈꺼풀은 어느새 거제의 푸른 밤바다 아래로 침잠합니다.

 

서울에 올라가면 등산화를 수선해야 합니다. 사량도의 풍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던 주인을 닮았는지 등산화 밑창이 딱 벌어져 버렸거든요. 지리망산의 험한 산세 때문이었는지, 멋진 바다 풍광에 놀란 탓인지는 등산화가 말을 못하는 관계로 물어볼 순 없지만 아마 제 주인이 이곳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길 바랐던 모양입니다. 새 등산화를 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도, 제주의 올레길도 오롯이 함께 했던 오랜 동행을 쉬이 내칠 수는 없는 법.

 

 

 

 

 

 

 

물건이라는 건 유행을 따라 더 예쁜 것이면, 더 새 것이면 좋겠다 항상 바라왔던 내가 몇 년이나 써 온 물건에 이리도 애착을 가지다니.. ‘버릴 수가 없어서’라며 다락방에, 창고에 꾸역꾸역 물건을 쌓아두던 할머니를 닮아가나 봅니다.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나 봅니다.

 

앞으로도 이 신을 신고 부지런히 다닐 것입니다.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 보고, 바다에서 산을 올려 보며 이 땅의 구석구석을 누빌 것입니다. 30대의 싱글녀는 종교, 고양이 또는 등산에 탐닉하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생생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겁니다. 지금 내가 대한민국의 어디에 있던지 지척에 찾아갈 수 있는 바다와 산이 있어서 나는 우리 나라가 참 좋습니다.

 

 

 

 

 

좋은 산행’은 하루를 짧게 하지만
인생을 길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