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고 그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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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심 광장에서 돈두르마(떡처럼 쫀득거리는 터키의 전통 아이스크림)를 하나 사서 대견한 스스로를 치하합니다. 막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참입니다.


‘아시아에서 아침 식사를, 유럽에서 후식 커피를!’이 실현되는 곳, 이곳은 터키입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하나의 나라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다리 하나 건너서 대륙 넘나들기라니,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지도 모를 일입니다.

 

 

 

 

광장 주변을 설렁설렁 걷고 있을 때,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옵니다. 자신을 항공사 스튜어드라 소개하는 이 그리스 남자는 이스탄불로 비행을 끝내고 난 후 주어진 여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죠. 그는 내게 터키의 인상을 물어왔어요.

 

저는 알고 있는 모든 영어를 동원해 터키 예찬을 했더랬지요. 5월의 터키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웠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저를 향해 뷰티플을 외쳐 대는 터키인들은 더없이 친절했거든요.

 

(‘예쁘다’는 말을 여태껏 한국에서 삼십 년 넘게 살아오며 들었던 것보다 더 자주, 그것도 하루 만에 듣곤 했으니 어찌 이런 터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예쁘다’가 ‘예쁜 여자’에게 주어지는 말이 아니라 ‘외국인 여자이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말임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지요.)

 

 

 

 

 

 

터키에 홀딱 반해 있는 저에게 그는 터키와 그리스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얘기해 줬습니다. 그의 어투엔 터키를 향한 원망이 담겨 있었어요. 세상의 모든 근심, 미움, 염려를 넉넉히 품고도 남을 듯한 푸른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터키와 그리스는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다투고 지배하던 관계라는 걸 그 때 알게 되었지요.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오? 매사를 정확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그리스인 조르바], 이 책이 처음 제 마음에 들어온 건 조르바가 주인공 화자에게 들려준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꼭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거든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늙은이 조르바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회가 정답이라고 알려준 길과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죠. 자유인입니다. 지식에, 나이에, 돈에 구애 받지 아니하고 굴복하지도 아니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는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지치지 않는 열정과 쉼없는 사랑이죠.

 

 

 

 

 

 

[그리스인 조르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명해 줍니다. 책을 덮을 즈음엔 나는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원하는 삶을 이루어가기 위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반문하게 되지요. 이렇듯 ‘사람냄새 나는 삶’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이 책은 터키와 그리스의 관계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친구는 터키에 대항해 저항군으로 활동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지요. 책을 읽으며 예전에 탁심 광장에서 마주쳤던 그리스인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가깝고도 먼나라 터키와 그리스. 대륙과 대륙 간에, 나라와 나라 간에, 지역과 지역 간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에 가깝고도 먼 사이는 얼마나 많을까요?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멀어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믿는 것은 인간도 그리고 역사도 시간이 흐를수록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는 겁니다. 이해함의 너비도 지혜로움의 깊이도 세월과 함께 크고 깊어갈 거란 믿음이죠. 언젠가 한국과 일본이, 터키와 그리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원망 없이 화해함으로 지내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나는 오늘 한 사람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의 옆에서 나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지요. 곁에 가까이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던 당신입니다. 원망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을 이해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저의 [이해함]의 그릇은 커졌고, 저는 [조르바]처럼 살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주눅 들지 않고 눈 꽉 감고 질러버릴 수 있는 삶을 만들어가기로 했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나는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