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인문학]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삐딱이, 그리고 ‘클리나멘’

2020. 6. 22. 10:56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Lucretius). 어느 날 그는 비 내리는 풍경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빗속을 향했던 이유는 바로,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룩주룩 지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는 빗줄기 가운데, 유독 비뚜름히 떨어지는 빗줄들이 몇몇 있었죠. 이 모습을 보며 루크레티우스는 불현듯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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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을 가로지르는 사선의 힘


루크레티우스가 얻은 ‘빗속의 깨달음’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일 때, 만약 전혀 다른 방향과 예측 불가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우발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 충돌로 인해 전에 없던 무언가를 생성하게 된다.



자동차 도로가 연상되는데요. 동일한 차선에서 자동차들은 한 방향으로, 즉 직선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차량 한 대가 차선을 벗어나 사선으로 내달린다면? 옆 차선 혹은 반대 차선의 차와 부딪히겠죠. 현실에선 결코 없어야 할 상황이지만, 인문학적 세계에선 다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이 같은 ‘비껴감에 의한 충돌’을 우리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생성의 에너지라고 보았어요.

 

빗속에서 ‘클리나멘’을 발견한 루크레티우스 | 출처: Wikimedia Commons 


루크레티우스의 이 사상을 계기로 ‘가로지르기’, ‘사선’, ‘어긋남’, ‘편위’, ‘편차’, ‘횡단’ 같은 단어들이 인문학적 색채를 띠게 되었는데요. 그는 이 모든 개념을 총칭하는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용어를 창안하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혹시 이 광고 카피 기억하시나요?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2000년 초 유행했던 한 증권사 CF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국민적인 유행어로 자리잡기도 했죠.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과 잘 어울리는 문구입니다. 모두가 ‘예’라고 하는 상황은, 수직으로만 낙하하는 빗줄기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바로, 사선으로 내리는 특별한 빗방울이라 할 수 있겠죠.


그 사람은 분명 ‘예’라고 말한 많은 이들과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관계가 불편해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충돌의 과정 속에서는 분명 새로운 논의가 생겨날 거예요. 모두가 ‘예’라고 했다면 결코 이야기되지 못했을 주제들 말입니다. 요컨대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이란, 세계를 보다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생성의 요소, 즉 ‘다양성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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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이는 사실 삐딱한 게 아니다


TV를 봐도 라디오를 켜도

삐딱이의 모습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네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는 삐딱이


조금 삐딱하면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네

조금 삐딱하면 손가락질하기 바쁘네


록그룹 윤도현 밴드의 곡 <삐딱하게>에 나오는 가사 일부입니다. 노랫말 속 ‘삐딱이’도 어쩌면,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에 해당하는 존재일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 노래는 상당히 깊은 여운을 남기면서 끝나는데요. 마지막 소절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그가 서 있는 땅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네


윤도현 밴드의 <삐딱하게> | 출처: MBCkpop 유튜브


‘삐딱이’가 서 있는 땅이 삐딱하게, 즉 사선으로 기울어진 상태라는 뜻입니다. 삐딱한 땅에 삐딱하게 서 있으므로, 그 사람은 사실 삐딱한 게 아니죠. 삐딱이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반듯하게 서 있는 셈입니다. 다만, 타인들의 시선에는 삐딱이도 그가 서 있는 땅도 기울어진 모습으로 보였던 거죠.


사선으로 내리는 빗방울이 눈에 띄는(삐딱해 보이는) 이유, 수많은 yes들 중 단 하나의 no가 튀어 보이는(삐딱선을 타는 듯한) 까닭, ‘클리나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클리나멘을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성향은 이미 실험으로 증명된 바가 있는데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olomon Asch)가 1950년대에 발표한 동조 실험(Conformity Experiments)’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10명 중 9명이 오답을 말하면, 나머지 1명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오답을 말하더라는 거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똑같은 문제를 구두가 아닌 서면으로 제시한 경우에는 정답률이 높았다고 해요. 이를 애쉬는 ‘동조 현상’이라 칭하면서, 인간에게는 아무리 오답이라 해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동조 현상. 곰곰 생각할수록 좀 무섭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삐딱이’들은 어쩌면, 동조 현상의 피해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삐딱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대다수가 다 삐딱이라고 부르니 너도 나도 따라서 삐딱이라 부르게 돼버린 결과랄까요.


이런 맥락에서, ‘클리나멘을 볼 줄 아는 시선’은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빗줄기가 수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10명 중 9명이 yes라 해도 1명의 no는 중요하다, 인생은 직진이 아니라 사선일 수도 있다, ···라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기! 고대 로마 시절 ‘빗속의 철학’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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