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66! 2016년에 돌아 보는 그때, 그리고 지금

2016. 12. 16. 14:42



1960년대, 모든 사람들이 나은 살림살이를 위해 너나 없이 비지땀을 흘리던 때이죠.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아질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고 기억하는 . 흑백 기록물 속에만 남아 있던 당시의 생활들을 한번 꺼내어 봤습니다.



 인구 


우리나라 인구를 말할 '사천 오백만'이라는 표현을 썼던 엊그제 같은데 어느 '오천만' 국민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2016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는 5166만명으로 조사 됐는데요. 1966년에는 지금의 절반 정도 수준인 2 7백만 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가했는지 실감이 되시나요? 


1960년대에는 이렇게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구를 제한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었는데요. 유명한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면한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기르자' 등의 표어가 나온 것이죠. 하지만 최근엔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들어 오히려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초저출산국가로, 이런 추이라면 인구 5천만 시대는 2045년까지만 지속된다고 하네요. 이제 '출산=애국' 되는 시기가 도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장면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음식으로 대변되는 음식 자장면. 50 전과 지금 가격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지금 5천원 정도인 자장면 그릇은 1966년엔 15원이었습니다. 자장면은 생일, 입학, 결혼식 우리 서민의 삶과 함께 음식이죠. 까만 소스가 끼얹어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탱글한 면을 섞을 때면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침이 고이곤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맛있는 자장면. 지금도 TV에서 누군가 먹고 있는 모습만 나오면 슬며시 전화기를 들게 되는걸 보면,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국민 외식 메뉴' 계속될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버스비


아직 서울의 거리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 66 버스요금은 8원이었습니다. 기본요금 1200원인 지금과 150 차이가 나는 금액이네요. 택시가 있었지만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를 이동 수단으로 삼던 그때. 버스는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였습니다. 그래서 소위 '안내양'이라고 불리는 버스 차장이 필요했던 것이죠. 내리는 곳을 지나치는 손님들이 없도록 버스 기사님께 일일이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손님들이 후에 '탕탕' 버스 벽을 두드리며 '오라이~' 외치곤 했죠. 미처 버스비를 내지 않은 손님들에겐 일일이 버스비를 받기도 했고요. 


지금은 교통카드를 찍으면 - 소리와 함께 결제되고, 매월 일괄적으로 결제되곤 하니, 사실 정확히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저 카드 고지서로 치의 요금만 확인할 있을 뿐이지요.





 영화비 


지금은 최소 8천원, 눕다시피 다리도 뻗을 있고 식사를 하며 있는 자리라면 훨씬 값을 치르고 보아야 하는 영화 . 1966 당시 영화 한편의 티켓 값은 65원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도, 신기한 3D, 4D효과도 없는 때였지만 한국 영화계의 60년대는 1 전성기라 불릴 만큼 호황이었습니다. TV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신성일과 문희, 김지미 청춘 스타들의 로맨스 영화를 구경하는 시민들에겐 커다란 즐거움이었을 겁니다.





 1인당 GDP


현재 우리나라 1인당 소득(GDP) 2892만원으로 세계 29위입니다. 2015 국내 생산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계 11위의 결코 작지 않은 경제 규모이지요. 그렇다면 1966년엔 어땠을까요? 1인당 GDP 지금의 20분의 1수준인 147만원이었다면, 믿으실까요? 물론 물가상승률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이 돈의 가치로 숫자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의 경제 규모가 그때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는 부정할 수는 없을 거에요. 


60년대 중반, 당시 초급 공무원 월급이 4천원, 80kg 가마니가 3 500, 서울 미아리의 채가  70만원이었다고 하니 당시와 지금의 경제 규모와 비교해 조금 체감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너나 없이 함께 경제 재건을 위해 노력하던 그때, 효성의 공장 역시 없이 돌아가며 대한민국의 성장을 뒷받침하던 시기였습니다. 





 예금 금리 


지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인 덕선이 아버지는 한일은행에 다니는 행원입니다. 덕선의 친구이자 프로 바둑기사인 택이가 어마어마한 금액의 상금을 탔다고 하자 동네 사람들 모두 땅을 사라, 아파트를 사라 하며 재테크에 참견을 하지요. 그러던 덕선 아버지는 '은행에 넣고 이자를 받는 것이 최고'라고 주장합니다. 


"요즘 금리가 쪼까 떨어져가지고 15%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은행만큼 안전한 곳이 없지~"


장면을 보던 순간, 1988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낀 저뿐만이 아니겠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1966 예금 금리입니다. 자그마치 25%였다고 하는데요. 2%남짓인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꿈의 숫자' 아닐 없네요. 





 효성 매출


처음 나이론 제조를 중심으로 기간산업에서 시작한 효성은 보다 다양한 섬유와 소재 사업으로 확장을 꾀하였고 현재 건설, 신재생에너지, 첨단산업소재 다양한 산업군에서 미래 먹거리를 육성하며 매출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덕분에 1971 105억원이던 매출은 2016 현재 12 4585억원에 이르렀습니다. 


효성의 매출이 이렇게 성장한 산업군의 확장뿐만 아니라 사업장의 확장도 역할을 합니다. 2016 현재 효성은 전세계 30개국 100 사업장을 보유한 글로벌기업인데요. 아시아, 유럽, 남미 글로벌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있고,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타이어코드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전체 매출의 70%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 다다른 것이죠. 


글로벌 경영은 우리나라의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국내 R&D 신규 사업 육성에 투자하는 선순환, 효성이 그림을 그리며 성장해 나가는 방법입니다.





 효성 특허


효성이 가지고 있는 '최초' 기록은 많습니다. 1967 국내 최초로 나일론 타이어코드 생산을 시작으로

78년엔 국내 최초로 PET병과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지 생산을 시작했고, 2011년에는 자동차 등에 쓰이는 고성능 탄소섬유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1973 건의 특허만을 등록하고 있던 효성은, 2016 현재 1597건의 특허를 보유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기 위한 효성의 노력은 앞으로도 숱한 ' 역사'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50년도


50년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자장면은 여전히 맛있다는 , 은행에 넣을 돈은 여전히 여유롭지 않다는 , 그리고 효성이 우리 생활 곳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효성은 지금, 여기, 시간을 살아가는 여러분 곁에 자연스레 스며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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